성만징(成萬徵, 1659-1711)


성만징(成萬徵, 1659-1711)                                  PDF Download

 

성만징은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자는 달경(達卿)이고 호는 추담(秋潭)·환성당(喚醒堂)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수제자로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 윤증(尹拯)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렸다. 숙종 연간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여 송시열이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 되고 이어서 사약(賜藥)을 받게 되는데, 그는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고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향하였다.

학술적으로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애초에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논쟁(同異論爭)인 호락논변이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 제기되자 ‘인성이 물성과 다른 것은 기(氣)의 국(局) 때문이며, 인리(人理)가 곧 물리(物理)인 것은 이(理)의 통(通)때문이다.’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을 들어 한원진의 상이론(相異論)에 동조하였다.

성만징은 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頤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厚) 등과 함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로 불렸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인물성동이본변(人物性同異論辨)이 활성화 되었다. 이 논쟁은 지역적으로 낙파(洛派)와 호파(湖派)로 나뉘어 격론을 벌였다. 성만징은 ‘성은 곧 이(性卽理)’라는 설과 ‘이기가 혼융(混融)하다’는 설을 내세워 낙파의 설을 지지하였다.

1703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왕자사부(王子師傅)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04년 만동묘(萬東廟)의 향사(享祀)를 둘러싼 논쟁 때 송시열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예학에 밝았으며, 문경의 한천사(寒泉祠)에 배향되었다. 시문집인 《추담문집》이 있다.

추담문집》은 8권 3책으로 된 목활자본이다. 1926년 후손 해중(海重)이 편집하고 간행하였다. 권말에 7대손 석(檡)의 발문이 있다.

시에는 차운(次韻)·증별(贈別) 또는 만시(輓詩)가 많고, 기타 영물(詠物)·감회를 나타낸 것도 상당수 있다. 「우음(偶吟)」은 『대학』을 300번 읽고 3개월의 정좌 끝에 깨달은 바를 옮긴 시라고 주석되어 있다. 「별이주경세석연행(別李周卿世奭燕行)」과 「유감(有感)」에서는 청나라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서 중에는 이세필(李世弼)과 교환한 서찰이 많은데, 여러 선생의 예설(禮說)을 분류하고 편차(編次)하여 심도 있게 논구한 내용이 들어 있다. 권상하(權尙夏)에게 올린 문목(問目)에는 이기설과 경전에 대한 훈고(訓詁)·예설 등이 있다.

예설에 관해서는 혼례 때 신랑·신부의 위치와 음식을 진설하는 방법이 이유태(李惟泰)의 집안에서 쓰는 고례(古禮)와 주희(朱熹)의 『가례(家禮)』가 서로 다른 것에 관해 묻고, 이어 서동부서(壻東婦西)로 된 고례의 서부즉석설찬도(壻婦卽席設饌圖)를 그려 넣고 있다. 기타의 서에도 성리설과 예설에 관한 내용이 많다.

잡저의 「만동사시비변(萬東祠是非辨)」은 당시 만동묘(萬東廟)에 있는 명나라 신종의 신위를 두고 일부에서 선비가 천자를 제사하는 것은 외람된 일이라는 등의 시비가 있자, 그에 대해 반박한 글이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