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윤석(黃胤錫)


황윤석(黃胤錫)                                                              PDF Download

1729년(영조 5)∼1791년(정조 15) 조선 후기의 문인이다.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영수(永叟), 호는 이재(頤齋)이며 서명산인(西溟散人)․운포주인(雲浦主人)․월송외사(越松外史) 등으로도 불렀다. 1727년 4월 8일에 전라도 고창 흥덕현 구수동(지금의 고창군 성내면 조동)에서 만은(晩隱) 황전(黃廛)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미호(美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문인이다.

황윤석은 5․6세 때 할머니 김씨 부인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7세 때 「소학」․「사기」․「사서오경」․「제자백가」 등을 두루 읽기에 이르렀다. 이미 6세 때에 쉬운 글자를 맞추어 시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문학적 재주가 뛰어났다. 천성이 워낙 책을 좋아하여 외가의 서재에서 수일 동안 책을 읽느라 허기는 물론 집에 돌아갈 생각도 잊었다고 한다.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어렸을 적부터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 구암(龜巖) 황재중(黃載重)이 농암 김창협의 문인이었다. 아버지 황전은 김창협 문인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로써 낙론계열과 집안 대대로 교유하는 사상적 기틀이 만들어졌다. 황윤석은 기호학파 낙론계열의 학맥을 계승하며 주자․송시열․김창협․김창흡․김원행을 존숭하며

“우리의 가학은 진실로 우암(송시열)과 농암(김창협)의 학맥”

이라고 자처하였다. 또한

“우암은 주자의 정맥이고 농암과 삼연(김창흡)은 우암의 충신이다”

라고 하였는데, 송시열․김창협․김창흡으로 이어지는 학통의식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후일 김원행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게 되는 요인도 가문의 학문적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김원행은 김창협의 양손자로, 정통 노론계열 학통을 이으면서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당시 많은 제자들을 강학하고 있었다. 황윤석은 36세 때 석실서원에 있던 김원행을 찾아갔는데, 이때 홍대용을 비롯한 김원행의 여러 제자들을 만나 이들과 교유하면서 서양과학을 접하는 등 학문의 폭을 넓힌 것으로 보인다. 이에 황윤석은 문학․경학․예학․천문․지리․의학․풍수 등 정치․경제․사회․농업 제반 분야의 학문에 접할 수 있었다. 스승 김원행이 ‘진정 호남의 호걸의 선비[眞湖南豪傑之士]’라 한 것과 서명응의 ‘박학지사(博學之士)’, 영조의 ‘박식자(博識者) 등의 평가는 바로 이러한 학문적 박학성에 연유한다.

황윤석의 행장에는

“옛날의 군자는 하나의 사물이라도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라고 하여 학문하는 자가 격물치지(格物致知)가 되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박학한 선비로 이름난 사람들을 찾아가서 배우고 토론하는 등 배움에 권태로움을 느끼지 않았고, 중국에서 새로 나온 서적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입수하여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등 그의 박학에 대한 열의를 볼 수 있다. 황윤석이 남긴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저작물은 그가 어떤 자세로 학문에 임하였는지 잘 알 수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죽기 전까지 남긴 저서로는 「이재난고(頤齋亂藁)」․「이수신편(理數新編)」․「산뢰잡고(山雷雜攷)」․「자지록(資知錄)」․「역대운어(歷代韻語)」․「성씨운휘(姓氏韻彙)」․「성리대전주해(性理大全註解)」․「구경잡록(九經雜錄)․「소학강의(小學講義)」 등이 있다. 아버지 황전 역시 책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누군가가 책을 팔러오자 밭 갈던 소와 책을 교환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황윤석은 10세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죽기 이틀 전까지 계속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이재난고」가 그것인데, 분량도 방대하지만 그 내용 또한 다양하여 그의 학문적 성향과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천문(天文)․역학(易學)․견문(見聞)․기행(紀行)과 학술적 논설 및 그 시대의 생활상 등 조선후기의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그의 일기 내용 중의 과거 시험의 폐단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한다.

황윤석이 경희궁 후정시(後庭試)에 응시한 1764년 4월 1일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민홍열(閔弘烈)이 장원이었고 향유는 모두 낙방했다. 이날 초저녁에 임금이 새로 과거에 합격한 다섯 사람이 모두 경성에서 나오고, 향유 중에는 한 사람도 참여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일 다시 경희궁에서 후정시를 열라고 특별히 명했다.”

지방출신인 향유(鄕儒)와 달리 서울출신인 경유(京儒), 경유 중에서도 경화사족(京華士族)의 정치적 위세는 과거시험의 공정성을 저해하는 요소였다. 과거시험에 경유들만 합격하고 향유는 한명도 합격하지 못하였으므로 임금이 향유들을 위한 과거시험을 다시 시행하라는 명이다. 이것은 향유들을 배려한 조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임금부터 이미 경유(京儒)와 향유(鄕儒)의 구분을 뚜렷이 하고 있었다. 그만큼 경유들은 과거급제에 유리했고, 경화세족의 자제들은 급제가 당연시되었기 때문이다. 황윤석은 이러한 과거시험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1766년 2월 16일 일기 중의 한 대목이다.

“지금 재상 이하부터 처음 벼슬한 집에 이르기까지 무릇 조금의 세력이 있는 사람은 거의 모두가 방(榜)에 게시한 명단에서 누락되는 경우가 없고, 권세가에 빌붙은 향유도 많이 합격한다. 그러나 이렇지 않는 사람은 낙방한다. 심하다! 과거의 폐단이 하늘을 찌름이.”

 

그해 3월의 정시(庭試) 결과는 합격한 향유는 한 사람도 없었다. 6명이 합격했는데, 모두 쟁쟁한 가문의 자손들이 합격했고, 향유는 모두 떨어졌다. 이것은 비단 향유만 겪는 설음은 아니었다. 노론 집권층 내에서도 인사권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인맥에 의해 합격자가 결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장에서부터 경유들, 특히 경화사족들은 위세를 부리면서 특별하게 굴었다. 과거장에 시중을 드는 수종을 3․40인씩 데리고 들어와 우산과 장막을 둘러 자리를 맘대로 넓게 차지하는가 하면, 향유가 부득이 인접한 자리를 잡으면 칼을 뽑아 머리를 부수고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그들은 시험 정보에 밝아 시험 감독관이 누군지 짐작했으며, 오늘날의 과외선생에 해당하는 독선생을 모시고 시험 답안지를 본격적으로 익혀 사륙변려문에 능하기도 했다. 합격자 예상에도 밝았으며, 과거시험장에서 글씨는 대신 써주는 서수(書手)를 데리고 와서 시험지를 대필하게 하였다. 그 모든 것은 한미한 가문에서 올라온 향유들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향유들은 오직 홀로 자기가 준비한 공부로 자기 손으로 답안지를 써서 제출하는 것 외에는 아무 방법이 없었다.

1766년 3월 3일 일기의 내용이다. 황윤석은 두호(杜湖)로 조정(趙晸)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댁 자제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일을 위로하니 조정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 것을 기록하였다.

“그 애는 초시도 매우 다행이라네. 과거시험을 주재하던 시험관이며 재상인 김상복(金相福)이 과거시험에서 서너 명을 선출하였는데, 대제학 정실(鄭實)의 아들 정지환(鄭趾煥)이 명성이 있어 장원이 되었네. 임금께서 합격자의 총 명단을 물리치시고 이전 대제학 황경원(黃景源)에게 2등으로 급제한 사람을 고쳐 내라고 다시 명하시니 곧 장원은 이한경(李漢慶)이 되었지. 그는 작고한 남인출신으로 참판 이제화(李齊華)의 아들이고 지금 명성이 있는 이성경(李星慶)의 동생이라네. 이런 과거시험에서 어찌 쉽게 합격하겠는가.”

이것은 명문세족의 집안출신이 아니고서는 과거시험에 합격하기가 어려움을 토로한 글로써, 과거제도의 많은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1770년 9월 10일의 일기에는 과거시험장에서 생긴 불상사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경의궁(慶熙宮) 흥화문(興化門) 안으로 과거를 응시하러 갔다. 그런데 과거 시험장 문에 들어서서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다가 뒷사람들에 의해 급히 떠밀려 넘어지면서 왼쪽 손바닥의 살갗이 벗겨져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부득이 상처의 아픔을 참고 견디며 이를 감싸고 수습하느라 시험의 답안지를 늦게 제출하게 되었다.
이처럼 황윤석의 일기인 「이재난고」 가운데 상당한 분량은 경화사족들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가 할애되어 있다. 이것은 황윤석의 진로나 벼슬길과도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예민하게 수집․기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이재유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윤석, 사환을 위해 떠돈 시간의 내면풍경」(이지양, 「고전과 해석」5,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08), 「이재 황윤석의 詩 연구」(김대하, 공주대학교 석사논문,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