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헌(申櫶, 1810-1884)


신헌(申櫶, 1810-1884)                                           PDF Download

 

산신씨는 조선에 상신 8명, 대제학 2명, 판서 20여 명과 많은 무장을 배출하였는데, 대부분 문희공파, 정언공파, 사간공파에서 나왔다. 이 중에서도 정언공파는 영의정 신흠(申欽)을 중심으로 하는 문신집안이고, 문희공파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신립(申砬)을 중심으로 하는 무신집안이다.

신헌은 초명이 관호(觀浩)이고 자는 국빈(國賓)이며 호는 위당(威堂), 금당(琴堂), 우석(于石)이다. 할아버지는 훈련대장 신홍주(申鴻周)이며 아버지는 부사 신의직(申義直)으로 전형적인 무관가문에서 태어났다.

신헌은 유장(儒將)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려서 당대의 석학이며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과 김정희(金正喜) 문하에서 다양한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리하여 무관이면서도 학문적 소양이 깊었고, 또 개화파 인물들인 강위(姜瑋), 박규수(朴珪壽) 등과 폭넓게 교유하여 현실에 밝은 식견을 갖고 있었다.

1827년(순조 27) 할아버지 신홍주의 후광을 업고 별군직(別軍職)에 차출되었다가 이듬해에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순조, 헌종, 철종, 고종조에 걸쳐 중요 무반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헌종 때에는 왕의 신임을 받아 중화부사,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봉산군수,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849년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헌종이 급서하고 철종이 등극하자 안동김씨 일파에게 배척받아 한동안 정계에서 유리되었다. 헌종이 위독할 때 사사로이 의원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했다는 죄목으로 1849년에 전라도녹도(鹿島)에 유배되었는데, 철종의 배려로 1857년에 풀려났다.

철종 대에는 1861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이어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우포도대장 등을 두루 지냈다. 고종 초기에도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형조·병조·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摠戎使)로 강화의 염창(鹽倉)을 수비하였다. 난이 끝난 다음 좌참찬 겸 훈련대장에 임명되고 수뢰포(水雷砲)를 제작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그 뒤 어영대장, 지행삼군부사(知行三軍府事), 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874년 진무사(鎭撫使)에 임명되었다. 이 때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연해의 요해지인 광성(廣城), 덕진(德津), 초지(草芝) 3진(鎭)에 포대를 구축해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운양호(雲揚號) 사건 이듬해인 1876년에는 판중추부사로 병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강화도에서 일본의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구로다(黑田淸隆)와 협상을 벌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개항 정책을 취하게 되어 점차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불평등조약이었기에 일본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조약은 위정척사 세력과 개화 세력 사이의 대립이 일어나는 정책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의 협상 전말을 신헌은 『심행일기(沈行日記)』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유장으로서의 신헌의 면모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정약용의 민간자위전법인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 발전시켜 <민보집설(民堡輯說)>, <융서촬요(戎書撮要)> 등과 같은 병서를 저술하여 자신의 국방론을 집대성시켰다. 또한 김정희로부터 금석학(金石學), 시도(詩道), 서예 등을 배워 현재에는 전하지는 않지만 『금석원류휘집(金石源流彙集)』이라는 금석학 관계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예서(隷書)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지리학에도 관심이 높아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제작에 조력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유산필기(酉山筆記)>라는 역사지리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농법에도 관심을 가져  <농축회통(農蓄會通)>이라는 농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1843년(헌종 9) 전라도우수사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해남 대둔사(大芚寺)의 초의선사(草衣禪師)와 교유하면서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을 두었다.

<훈국신조군기도설(訓局新造軍器圖說)>, <훈국신조기계도설(訓局新造器械圖說)> 등을 지었고, 수뢰포, 마반포차, 쌍포합이 등 신무기 개발을 주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