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부(姜浩溥)1690∼1778 –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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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0(숙종 16)∼1778(정조 2).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관은 진주(晉州). 자는 양직(養直). 호는 사양재(四養齋)이다. 강진휘(姜晋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덕후(姜德後)이고, 아버지는 시정(寺正) 강석규(姜錫圭)이며, 어머니는 김성급(金成岌)의 딸이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이다.

지난번 글에 이어서 여기서는 그의 경세론을 소개하고자 한다.

강호부는 영조 원년(1725) 당시 조선의 현실을 ‘수노지인(垂老之人)’에 비유하였다. 정기가 소모되고 지원(眞元)이 빠져나가 거의 노인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게다가 조섭과 보양을 잘하지 않아서 온몸이 병으로 물들어 고통을 겪고 있으니, 만약 대단한 진작과 치료가 없다면 죽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가 생각하는 ‘대단한 진작과 치료’가 바로 경장(更張)과 변법(變法)이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오직 경장에 잇을 따름이다”라거나 “비록 요순과 공맹이 지금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법을 바꾸지 않는다면 장차 다스릴 방도가 없을 것이다”

라는 그의 말은 경장과 변법에 대한 강한 신념을 보여주는 말이다.

여기에서 그의 대표적인 경장의 모델인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을 살펴보자. 조선후기 부세제도의 모순 가운데 군정의 문란은 ‘양역(良役)의 폐단’으로 지칭되었다. 양반 사족들이 군역 부담에서 빠져나감으로써 군역은 오롯이 양인들의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양역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한 양역 변통책으로는 호포(戶布)․결포(結布)․유포(游布)․구전(口錢) 등의 방안이 거론되고 있었다. 그런데 강호부는 이 가운데 결포․유포․구전은 그것이 비록 옛 제도에 의거했다고 하지만 구차함을 면할 수 없다고 보았다.

먼저 결포의 경우 토지 면적을 계산해서 포를 내는 것인데, 당시 전세(田稅) 이외에 대동미(大同米)를 비롯하여 잡다한 세금이 토지에 부과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현행의 제도만으로도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이 과중하여 토지를 버리는 자들이 간혹 있는데, 만약 결포를 시행하게 되면 비옥한 토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토지가 버려질 것이고, 이는 생재(生財)의 근원을 막는 것이므로 시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강호부는 오직 호포만이 다른 방안에 비해 낫다고 생각했다. 주목할 것은 강호부가 호포제의 시행과정에서 주된 표적으로 삼고 있는 계층이 ‘향품중서지배(鄕品中胥之輩)’, ‘시전유타지류(市廛遊惰之流)’였다는 사실이다. 강호부는 이들이 값비싼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국가를 위해서는 터럭 하나도 뽑으려 하지 않는 무리들로 매도하였다. 호포제가 시행되면 이들이 더 이상 면역의 혜택을 누리지 못할 것이고, 이야말로 ‘균역의 좋은 법’, ‘백성을 구제하는 좋은 대책’이 된다고 평가했다.

또한 강호부는 호포제를 시행할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하여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당시 삼남(三南)의 각읍에서 활동하고 있던 수세법(收稅法)으로 작부법(作夫法)과 산결제(散結制)가 있는데, 작부법은 많은 폐단이 발생하고 있어서 백성들은 산결제를 원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그것은 토지 1결에서 쌀 25두를 관에서 직접 거두어 그 가운데 20두로 삼세(三稅)에 충당하고, 그 나머지 5두는 ‘잡역가(雜役價)’로서 일용의 각종 비용에 충당하는 방식이었다.

강호부는 바로 이러한 방식을 차용해서 1결당 23두를 거두어 그 가운데 18두를 삼세에 충당하고, 나머지 5두로 양역가(良役價)에 대응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그가 계산하기에 국가의 1년 경비가 대략 70여만 필이고, 전결의 총수가 1,222,290여 결이므로 평년에는 100만 결, 흉년에는 80~90만 결 정도에서 수세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1결에서 5두의 쌀을 거두어 양역 1필의 값을 충당하는데 충분히 여유가 있다고 보았다.

이 외에도 강호부는 당시 양역제 운영상의 문제점에 대해 거론하였다. 그것은 호포제로의 근본적인 개혁이 불가능할 경우 운영상의 문제점만이라도 해소하자는 취지의 논의였다. 그는 먼저 지방 행정구역의 구분 문제와 그에 따른 군액(軍額) 부과의 불공정성을 지적했다. 예컨대 큰 지역은 사방 수백 리에 달하고 작은 지역은 불과 10리에 지나지 않는데 군액의 부과는 그러한 면적의 대소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가호가 1000호에 미치지 못하고 양민의 숫자도 수백에 불과한데, 군액은 500~600명에 달하는 경우가 파생되고 있었다. 강호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호적을 고찰하여 민호가 적고 군액이 많은 읍의 군액을 민호가 많고 군액이 적은 곳으로 나누어 이송할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강호부의 제안은 ‘병성주현(幷省州縣)’론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현재의 주현(州縣)은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그 규모와 시설이 대체로 동일하다고 보았다. 일개 현의 경우를 보면 향리나 관속에게 지급되는 심부름꾼, 향교에 소속된 인원, 장교의 예하 인원 등이 수백 명에 가까웠다. 따라서 주현을 병합할 경우 이 인원에 해당하는 비용을 줄여 양역에 충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 강호부는 일로(一路)에서 수십 현씩 줄인다면 양정(良丁) 3만 정도를 일거에 얻을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또 하나의 제안은 삼남 지방 군액의 1/5을 양서(兩西) 지역으로 이송하자는 것이었다. 이는양서 지역의 양민들 태반이 본읍(本邑)의 장교나 관군의 수에 충족되어 있고, 여번(餘番) 수포(收布)가 모두 수령의 사익을 채우고 있다는 현실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강호부는 호포제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그에 수반된 여러 대책을 제시하는 등 양역 변통 문제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는 조선후기 양역변통책으로 거론되었던 결포․유포․구전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호포제를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하였으며, 호포제로의 근본적인 개혁이 불가능할 경우 행정 구역 재편을 통해 군액 부과의 불공정 문제를 해소하고자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병성주현’론이었다.

[참고문헌]

「18세기 정통주자학자의 현실인식과 학문적 대응-사양재 강호부의 저술을 중심으로-」(「한국사상사학」제31집, 구만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