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여룡(朴汝龍, 1541-1611)


 

박여룡(朴汝龍, 1541-1611)                                  PDF Download

 

송애집(松崖集)
송애집
여룡(朴汝龍, 1541-1611)은 조선시대 선조 재임 시기의 문신으로 1573년에 생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왕실의 행차를 호위하는 등의 공을 세워, 사옹원(司饔院) 직장(直長)에 임명되었다. 율곡 이이의 제자로 율곡집(나중에 율곡전서에 통합됨)의 간행에 기여하였다.

1541년(1세, 중종 36)에 해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면천(沔川,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 자는 순경(舜卿), 호는 송애(松厓), 시호는 문온(文溫)이다. 할아버지는 부사정(副司正) 문희(文喜)이고, 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 수의(守義)이며, 어머니는 증 호조참의 이윤화(李允華)의 딸이다. 박여룡의 집안은 5대조인 박담(湛) 때부터 해주 입암촌(立巖村)에서 살았다.

1557년(17세, 명종 12)에 연이어 부모님을 여의었다. 그는 갑자기 스스로 발분하여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면, 어찌 사람일 수 있겠는가?”

하고 수 십리 떨어진 곳으로 다니면서 글을 배웠다.

1570년(30세, 선조 3)에 율곡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다. 율곡은 이해에 교리직(校理職)을 그만두고 해주 야두촌(野頭村)에 내려와 있었다. 당시 율곡은 35세였는데 30살이나 된 박여룡이 공부에 열심인 것을 보고 성리학 서적을 주고 격려하였다. 이 격려에 힘입어 그는 3년 뒤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율곡의 밑에서 공부를 하던 당시 박여룡은 의문이 생기면 반드시 묻고, 물은 것은 또 반드시 필기를 하였다. 율곡 선생과 학생들 사이에 있었던 문답은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꼬박꼬박 기록을 하였는데 그가 배움을 좋아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松崖集卷之四․墓碣銘⌋)
율곡과 제자들과의 대화를 기록한 것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여러 벗들이 각기 술병을 가지고 정사(精舍)에 모여 선생을 모시고 꽃구경을 한 적이 있었다. 술이 반쯤 취하였을 때에 선생이 말했다. “옛날 사람들은 조금만 떨어져 있다가 만나면 반드시 공부한 것이 많은지 적은지 물었다. 제군들은 요사이 무슨 공부를 하였는가?” 박여룡(朴汝龍)이 대답했다. “일상적으로 하는 일을 점검해 보면, 다만 한자만큼 퇴보한 것만은 알겠는데 한치만큼도 진보된 것은 모르겠습니다.” 율곡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조신(操身)하는 공부가 있었기 때문에 그 한 자만큼 퇴보한 것을 아는 것이다. 만약 전연 방심(放心)하고 지나갔다면, 어찌 공부가 진보하였는지 후퇴하였는지를 알겠느냐?”

(⌈율곡전서⌋)

1573년(33세, 선조 6)에 생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1577년(37세, 선조 10)에 관직을 사퇴하고 해주 석담으로 돌아왔다. 그 전해에 율곡 선생은 우부승지, 대사간, 이조참의, 전라감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모두 사직하고 해주 석담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있었다. 박여룡은 송애(松崖) 계곡 위에 집을 짓고 이사를 하였다. 이 때문에 호를 송애(松崖)라 한 것이다. 그곳은 율곡 선생이 거처하던 청계당(淸溪堂)과 작은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매일 선생을 따라 배웠다.

1579년(39세, 선조 10), 율곡 선생과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석담어록(石潭語錄)을 완성하였다.
1581년(41세, 선조 14)에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었다.

1592년(52세, 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박여룡은 국왕이 의주로 피신하는 소식을 듣고, 해주에서 의병 500명을 모아 선조의 행차를 호위하였는데, 이 덕분에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관청인 사옹원(司饔院)의 직장(直長)으로 특진되었다. 이후에 정원과 밭의 채소 등을 관리하는 사포서(司圃署)의 사포(司圃)에 임명되었다.

1594년(54세, 선조 27)에 해서(海西) 생곡사(生穀使)로 파견된 뒤, 청양현감에 올랐다가 이듬 해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1597년(57세, 선조 30), 이 해 8월에 일본군이 다시 침략해왔다.(정유재란) 전쟁은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때도 공을 세웠다. 당시 조정에서는 박여룡의 공적을 논한 적이 있었는데, 선조실록 5월 15일 기록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선조 임금이 이르기를, “민간의 곡식도 점차 고갈되어 가는데, 왜 지난날 거두어들이지 않았는가?”하였다. 유성룡(柳成龍, 1542-1572)이 이렇게 대답했다. “박여룡(朴汝龍)이 만여 석을 거두어들였습니다. 그 포상으로 벼슬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조는 “그것이 분명하다면 상을 내릴 만하다.”고 하였다.

1598년(58세, 선조 31)에 임진왜란 이후의 논공행상(論功行賞, 공적을 논하여 상을 수여함)에서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다시 벼슬에 나가 호조좌랑, 평시서영(平市署令) 등을 거쳤다.

1601년(61세, 선조 34)에 공조정랑으로 사직하였다.
1605년(65세, 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임명되었다.

1610년(70세, 광해군 2)에 고향에서 동문계(同門契)를 만들어 스승 율곡 이이의 문집 간행을 준비하였다. 그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율곡집⌋의 간행은 그 이듬해에 이루어졌다. 당시 그가 율곡의 친구인 성혼(成渾)의 도움을 받아 편집, 간행한 율곡집은 시집 1권과 문집 9권으로 된 것이다. 시집 부분은 박지화(朴枝華) 등이 편집하고, 그는 문집 부분을 편집하였다. 이 책은 1611년에 해주에서 목판으로 발간되었다. 현재의 ⌈율곡전서⌋는 1742년에 시집, 문집, 속집, 외집, 별집 등을 합하고, ⌈성학집요⌋와⌈격몽요결⌋ 등을 포함시켜 1749년에 간행된 것이다.

1611년(71세, 광해군 3)에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스승 율곡과 제자들 사이의 문답을 기록한 석담어록(石潭語錄)이 있는데, 그 외 저작물은 대부분 전쟁으로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1726년에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가까이에 그를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다. 나중에 이 사당이 방현서원(傍賢書院)으로 확대되었다. 1777년에 유고집(송애집(松崖集))이 간행되었다.
⌈송애집⌋은 2권, 부록 2권 합 2책의 활자본(活字本)이다. 1776년에 후손 박서동(朴瑞東)이 수집하여 편찬하였으며, 1805년에 박상준(朴相駿) 등이 증보하여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