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즙(高用楫)-2


고용즙(高用楫)-2                                                        PDF Download

1672년(현종 13)∼1735년(영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미상(未詳)이며, 자는 제경(濟卿), 호는 죽봉(竹峯)이다. 임피(臨陂) 술산(戌山)의 죽봉(현재 전북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탑동마을)에서 출생하였으므로 호를 ‘죽봉’이라고 하였다.
앞의 내용에 이어 여기서는 고용즙이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의 내용을 소개한다. 고용즙은 경종(景宗)에서 영조(英祖)로 왕위가 계승되는 과정에서 희생된 4대신의 원통함을 드러내고 역적의 무리를 토벌하라는 상소문을 몇 차례 올렸다.

고용즙은 영조가 즉위한 초(1725)에, 상소를 올려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의 죄와 탕평책의 부당함을 논하였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 1721년부터 1722년에 걸쳐 세자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신임사화(辛任士禍)와 관련된 내용이다. ‘신임사화’는 신축(辛丑, 1721)과 임인(壬寅, 1722) 두 해에 걸쳐 일어난 옥사이다.

1720년(숙종 46)에 숙종이 죽고 소론의 지지를 받은 경종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했는데, 후사가 없었으며 병이 많았다. 김창집 등 노론의 4대신은 하루 빨리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노론 4대신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이다. 물론 소론측의 반대가 있었지만, 경종은 1721년 8월에 대비 김씨의 동의를 얻어 이를 실현시켰다. 유봉휘 등 소론이 이에 반대했으나, 결국 노론세력의 주장이 관철되어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노론측은 더 나아가 10월에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를 통해 경종을 대신하여 세제(후의 영조)의 대리 청정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발한 조태억(趙泰億)․이광좌(李光佐)․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耈) 등 소론 세력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던 중 사직(司直) 김일경(金一鏡)․박상검(朴尙儉) 등이 소를 올려 노론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고발하여 세제 청정을 상소한 조성복과 이를 강행한 노론 4대신, 즉 이이명․이건명․김창집․조태채를 파직시켜 유배를 보냈다. 이 밖의 노론 인사들도 대거 숙청되어 소론이 완전히 정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조성복이 왕에게 상소하기를,

“오늘날 동궁은 장성한 나이가 전하께서 선왕의 곁에 나가셔서 정사에 참석하실 때보다 갑절이 될 뿐만 아니니, 여러 정사를 밝게 익히는 것이 더욱 마땅히 힘써야 할 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신하들을 맞으실 때나 명령을 재결하는 사이에 언제나 세제(연잉군)를 불러 곁에 모시고 참여해 듣게 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일을 가르쳐 익히게 한다면 동궁께서 일에 밝고 익숙하게 될 것입니다.”

(「경종실록」1년 10월 10일)

경종 역시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다”면서 “만약 청정하게 하면 나라 일을 의탁할 수 있고, 내가 마음을 편히 하여 쉬면서 요양할 수 있을 것”

(「경종실록」1년 10월 10일)

이라고 하여 국사를 모두 세제에게 처리하게 하도록 하였다.

노론은 뜻밖의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별다른 노력 없이 소론이 주도하던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노론이 경종에게 대리청정의 명을 받아 내자 당연히 소론의 반대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삼사에서 먼저 왕을 찾아가 아뢰었다.

“전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이시고 신기가 왕성하십니다. 비록 병환 때문이라고 하교하시지만, 드러난 증세가 없으니 마땅히 더욱 분발하시고 힘쓰셔서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기를 기약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편안하고 한적한 방법만을 위하여 이런 정무를 놓을 생각을 가지시니, 신 등은 전대에 일찍이 이런 일이 있었음을 실로 알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마음을 빨리 돌이켜 비망기를 도로 거두소서.”

(「경종실록」1년 10월 13일)

 

조태구는

“국가는 전하의 국가가 아니라 곧 조종의 국가입니다. 옥새를 가지는 자리는 사람이 사사롭게 결정하는 곳이 아닙니다”

라고 주장하면서 대리청정의 명을 거두지 않는다면 돌아갈 수 없다고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사실상 말도 안되는 대리청정을 주장했던 노론들도 소론이 들고 일어서자 꼬리를 내렸다. 김창집은

“이제 여러 신하가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반드시 도로 거두시게 하려는 뜻이 신 또한 어찌 여러 신하와 다르겠습니까”

고 말하면서 집권할 수 있었던 아쉬움을 드러냈다.노론이 쥘 듯 했던 정권은 소론이 더욱 확실하게 쥐게 되었다. 소론은 곧바로 대리청정을 주장했던 노론 4대신, 즉 이이명․이건명․김창집․조태채를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저 무리들이 몰래 딴 뜻을 쌓아온 지 무릇 몇 해가 되었는데, 아침저녁으로 모의하고 밤낮 경영한 것은 모두 전하를 단속하고 하늘이 내릴 자리를 동요시키려 한 것이었으니 식자들이 전일의 일이 일어날 줄 안 지 오래 되었습니다. 만약 이 무리가 임금 아래에 하루라도 더 있으면 반드시 종사에 근심을 끼칠 것입니다. 청컨대 이들을 절도에 위리안치하고……”

(「경종실록」1년 12월 12일)

경종은 소론의 의견에 따라 김창집․이건명․조태채를 유배시켰다. 중국에 왕세제 책봉을 위해 가있던 이건명은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의주에 유배되었다. 이 밖의 노론 인사들도 대거 숙청되어 소론이 완전히 정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소론 정권은 노론 대신의 처벌을 유배형에서 끝내지 않았다. 이듬해 3월 목호룡(睦虎龍)은 남인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고 고변함으로써 노론의 비극이 또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소론은 노론이 전년에 대리청정을 주도하고자 한 것도 이러한 경종 제거 계획 속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목호룡이 임금에게 상소하기를,

“역적으로서 전하를 시해하려는 자가 있어 혹은 칼로써 혹은 독약으로 한다고 하며, 또 전하의 폐출을 모의한다고 하니,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입니다. 청컨대 급히 역적을 토벌하여 종사를 안정시키소서.……저는 비록 미천하지만 왕실을 보존하는데 뜻을 두었으므로, 흉적이 종사를 위태롭게 만들려고 모의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감히 이처럼 상변한 것입니다. 흉적은 정인중․김용택․이기지․이희지 등입니다.”

(「경종실록」2년 3월 27일)

 

이에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는 결국 사사되었으며, 또한 이들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대대적인 화를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용즙은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이 내용은 죽봉집권2, 「상소문(疏)」에 자세히 실려 있다. 고용즙이 올린 상소문의 내용은 주로 다음과 같다.

“이광좌는 임금을 시해한 역적인데 천지간에 편안히 살고 있다.……차라리 동해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습니다.”

“속히 이광좌․유봉휘․조태억 등의 죄를 바루시어 신명과 사람의 울분을 풀어주시고, 그 남은 흉적들은 죽일 수 없는 자들도 또한 모두 공론을 한번 들어보시고 차례로 서둘러 판단하시어 처분을 내리소서.”

“괴수들을 파하여 전하의 의혹을 풀고, 군부의 무고함을 씻으며, 난적의 죄를 다스려서 삼강(三綱)이 땅이 떨어지지 않게 하고 구법(九法)이 패하지 않게 하소서.”

소론의 입장에 있던 이광좌 무리를 처단하고 인륜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고용즙이 보기에, 역적의 두목은 이광좌이며, 이광좌의 죄는 한이 없으나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임금의 병환을 숨겼다는 것이다. 임금을 보호해야 할 처지에 있으면서도 임금의 병을 방치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것은 신하로써 차마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광좌가 임금의 병환을 숨긴 이유로써, 만약 임금의 병환이 드러나게 되면 세자를 세우려는 노론들의 죄를 물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고용즙이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의 내용은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 일파가 일으켰던 반란행위를 엄벌에 처할 것을 건의하고 있어, 당쟁이 심화되었던 당시 노론․소론의 갈등과 대립상을 엿보는데 참고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한글판 죽봉시문집」(죽봉시문집편찬위원회, 2016), 「죽봉 고용즙의 南征賦에 대한 고찰」(柳在泳, 「한국언어문학」제22집, 한국언어문학회,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