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우(金思禹,1857-1907)


 

김사우(金思禹,1857-1907)                                  PDF Download

 

1857(철종 8)~1907. 조선 후기의 한학자이다.

관은 안동(安洞)이며, 자는 인부(仁父), 호는 용암(勇菴)이다.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주성리(主城里) 인곡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김호벽(金好壁)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이 뛰어나 향리에서 후학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이후에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효학(孝學)을 겸비한 학자로서 당시 학계에 명망이 높았다. 간재의 학문은 스승인 임헌회(任憲晦)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임헌회는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서 홍직필이 이재(李縡)의 문인에게서 학문을 닦았다. 스승인 전우는 자신의 생각과 조금이라도 의견을 달리하는 점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그 잘못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김창협(金昌協)에게서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농암사칠의의(農巖四七疑義)를 지어서 그 불합리함을 지적하였고, 기정진(奇正鎭)의 「외필(猥筆)」을 반박하는 「외필변(猥筆辨)」을 썼다. 또한 이항로(李恒老)에게는 「화서아언의의(華西雅言疑義)」로 반박하였고, 이진상(李震相)에게는 「이씨심설조변(李氏心說條辨)」으로 반박하였다. 또한 의리정신을 숭상하고 조선조의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을 동방의 오현(五賢)이라고 칭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주성리(主城里)에 있으며, 저서로는 용암유고(勇菴遺稿) 3권이 있다.

용암유고는 조선 말기의 학자 김사우의 시문집이다. 모두 7권 3책으로 활자본이다. 1984년에 김사우의 손자 김덕회(金德會)․김명회(金明會)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서문과 발문은 모두 김세기(金世基)가 썼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전북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3에는 서(書) 202편, 권4에는 잡저 64편, 권5․6에는 잡지(雜識)로 경설(經說) 7편, 권7에는 서(序) 7편, 기(記) 3편, 명(銘) 1편, 발(跋) 1편, 제문 10편, 시 81수, 부록으로 행장․행장발(行狀跋)․묘갈․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 중의 「상간재선생(上艮齋先生)」․「답전선생(答田先生)」 등은 대부분 학문에 관해 토론한 글이다. 심성(心性)과 학문, 주기(主氣)와 허령심(虛靈心), 만물일체(萬物一體)와 이기(理氣), 체발(剃髮)과 의리(義理), 달덕(達德)과 이심(理心), 성사심제(性師心弟), 인심과 도심 등 성리학 전반에 걸쳐 논의하고 있다. 「사문문답(師門問答)」은 지각과 마음, 각식(覺識)과 심지(心智), 지각과 성(性), 기정진의 견해 등을 다루고 있어, 당시 전우학파의 주기적 입장을 살필 수 있다.

잡저의 「명도식인편설(明道識仁篇說)」․「생지위성주설(生之謂性註說)」․「용력어인설(用力於仁說)」․「대학정심설(大學正心說)」․「달덕설(達德說)」․「취정록(就正錄)」 등에서는 선현의 학설을 훈고(訓詁)하여 이기의 문제를 다루었다. 「추담별집부록(秋潭別集附錄)」은 전우가 저자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시의(時義)에 대해 써 보낸 글들을 모은 것이다. 창의(倡義)와 도학(道學)의 문제를 논변한 내용으로, 전우학파의 처세와 갈등을 고찰할 수 있다.

잡지에서는 중용과 사서(四書)의 의의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시 가운데 「유화양구곡운(遊華陽九曲韻)」․「덕산구곡(德山九曲)」․「십이난화(十二蘭畵)」․「십송화(十松畵)」 등은 도학자의 심성 수양을 의탁한 내용으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