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1646~1715)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1646~1715)        PDF Download

 

1. 생애
명곡 최석정(崔錫鼎)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초명은 석만(錫萬)이며, 자는 여시(汝時)·여화(汝和)이고, 호는 존와(存窩)·명곡(明谷)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했던 최명길의 손자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함이 남달라서 9세에 시서(詩書)의 전문과 사서(史書)를 읽었고, 12세에 이미 「주역(周易)」에 통달하여 손수 점치는 법을 그림으로 그렸다. 17세에 초시 장원을 하고 1671년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모두 지냈으며 8번이나 영의정 자리에 오르면서 전문 관료의 삶을 살았다. 숙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국가의 주요 현안을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가 남긴 저서는 「예기유편(禮記類編)」, 「명곡집(明谷集)」 36권, 「구수략(九數略)」 등이 있다.

 

2. 동양철학에 바탕을 둔 수학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 사회 재건을 위해서 실용 학문 지식이 필요했던 시기에 최석정은 수학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의 대표 저서인 「구수략(九數略)」 2권에는 고전역학을 바탕으로 한 수학이론을 정리하여 그 내용을 수록해 놓았다. 이 책은 기존 동양의 수학을 동양철학의 관점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해석한 수학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의 출간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최석정이 오랜 관직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기에 이런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을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당시의 다른 수학책에 없는 인용서 목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중국에 널리 알려진 산학책은 물론이고 중국에서 발간된 서양 수학의 내용을 번역한 「천학초함(天學初函)」과 「주산」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 책이 서양의 수학을 부분적으로나마 이 땅에 최초로 소개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구수략(九數略)」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수(數)의 기원과 근본을 설명하고, 덧셈․뺄셈․곱셈․나눗셈을 하기 위한 산대의 모양과 산대를 늘어놓는 방법, 분수를 나타내는 방법과 그 계산, 그리고 동양수학의 교과서인 「구장산술(九章算術)」의 재해석 등을 시도하고 있다. 규칙을 가지고 더해지는 급수의 합, 연립방정식(聯立方程式) 등의 방정식 이론과 풀이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 더욱 흥미롭다.

이 책을 통하여 최석정은 특히 이전의 수학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은 주산과 산대계산법을 비교하여 설명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는 중국의 주판셈을 설명하면서 자세한 계산법은 중국의 수학책 「산법통종(算法統宗)」에 있으므로 중복해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간략하게 언급하고, 당시 중국의 관사가 산대계산을 하지 않고 모두 주산(珠筭)을 사용하는 것과 일본이 역시 이 주산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모두 인식의 부족에서 오는 편견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최석정이 이와 같이 주판셈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던 것은 아마도 주산에 비해서 산대계산은 자유롭고 넓은 범위의 자릿수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며, 특유의 분방함과 확장성이 가능한 우리 고유의 산대계산법에 대한 자신감이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하낙변수(河洛變數)」 부분에서 다양한 마방진(魔方陣)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개된 46개의 마방진들은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방진 일부는 중국의 「양휘산법(揚輝算法)」과 「산법통종」에 나와 있는 것이지만, 「낙서오구도(洛書五九圖)」, 「낙서육구도(洛書六九圖)」, 「낙서칠구도(洛書七九圖)」, 「낙서팔구도(洛書八九圖)」, 「낙서구구도(洛書九九圖)」, 「범수용오도(凡數用五圖)」, 「기책팔구도」, 「중상용구도」, 「구구모수변궁양도(九九母數變宮陽圖)」 등은 다른 산학서(算學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최석정만의 유일한 창작품들이다.
이 책이 지닌 차별화된 특징을 다시 유추해본다면, 심오한 동양철학을 인간사의 법칙도 아니고 만물의 법칙도 아니며 점을 치는 수의 법칙도 아닌, 수학(數學)의 법칙을 적용하여 창안한 것이라 하겠다. 역학(易學)의 관점에서 수학을 설명한다는 것은, 수학을 하나의 잡학(雜學)으로 보지 않고 도학(道學)의 한 계통으로 파악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구수략」은 단순히 영의정 최석정의 지적유희의 소산인 수학책이 아니라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그가 다음과 같이 언급한 내용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수의 이치가 제아무리 심오하다할지라도 어찌 여기에서 벗어나겠는가? 이제 세상에 새로운 뜻을 밝혀서 「구장산술(九章算術)」의 모든 법칙을 풀고자하노니, 보는 사람은 새로운 설을 만들었다고 하여 홀대하지 말기를 바라노라.”

 

다시 말하면 최석정이 중국의 수학책에 있는 마방진을 연구하여 소개하면서 최석정만의 독창적인 마방진을 그의 저서 「구수략(九數略)」에 수록해 놓았는데, 그 중에서도 백미로 손꼽히는 「구구모수변궁양도(九九母數變宮陽圖)」는 최석정이 직접 명칭을 붙여준 것으로, 오일러보다 61년 앞서 발표되었다고 공인된 세계최초의 「라틴마방진」이다. 실제 모습을 제시하면 아래 그림과 같다.

 

2018율곡학인물-조동영-최석정편
「구수략」에 수록된 최초의 라틴마방진 「구구모수변궁양도」와 「구구모수변궁음도」 /이장주 교수 제공

 

그리고 최석정은 「구수략(九數略)」의 목록에다 「묵사집산법(默思集算法)」을 소개하였다. 이 책은 경선징(慶善徵: 1616~1690)이 지은 우리나라의 수학책인데, 이 책을 소개하면서 종6품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였던 그를 극찬하였다. 최고의 양반이 당시 중인 계급이 종사하는 경선징에 대하여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 학문의 세계에서만큼은 격이 없었던 서로의 관계를 보여주는 단초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면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최석정은 「주역(周易)」의 괘(卦)를 바탕으로 상수학(象數學) 이해개념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에 수학이 가장 많이 쓰였는데, 최석정은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선기옥형(璿璣玉衡)」 제작에도 참여하였던 것이다.

 

3. 당쟁의 대립 구도에서 국정을 이끌었던 최고관료
최석정은 다양한 학문에 대한 개방성과 현실 중심의 정책 입안자였다. 당시 주요 사상인 주자성리학에만 치우치지 않고 양명학, 수학, 천문학과 같은 학문을 수용하는 개방성이 그의 정치노선에도 크게 작용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후유증으로 호패법(號牌法), 호포법(戶布法), 주전론(鑄錢論) 같은 사회 정책을 두고 서로 다른 당파간의 정책 대립이 격렬한 시기에 현실 가능한 정책을 제시하고 추진하려고 하였다.

사회 모순을 점진적으로 해결해나가는데 중점을 두고 온건하고 합리적인 정치 노선을 추구하면서 소론의 입지를 지켜나갔다. 당시 소론의 영수였던 최석정은 노론 세력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비록 당파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서 여러 차례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나, 임금의 신임으로 다시 등용되곤 하였다. 그의 성정은 인자했으며 총명하고 박식하되 주장하는 논의가 각박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그가 온건한 정치 성향에 영향을 준 배경에는 학문의 배경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여진다. 서인 세력이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하면서 최석정의 스승인 남구만(南九萬)과 또 다른 스승 박세채(朴世采)는 소론을 이끌던 사람들이였다. 최석정은 12살 때부터 남구만의 문하에서 글공부를 하였다. 남구만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역사지리에도 밝아서 역사지리에 대한 견해를 최석정에게 편지로 말하곤 하였다.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발표해서 양당의 대립을 막으려고 했던 박세채 또한 최석정의 스승이었다.

최석정-초상
보물 제1936호 최석정 초상 /문화재청

그의 할아버지 최명길은 우리나라 초기의 양명학자(陽明學者)였으며 그의 친구 정제두(鄭齊斗)는 우리나라 양명학을 집대성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다른 학문을 수용하는데 개방적이고 정치적 대립에서도 온건했던 소론의 성향이 그의 정치 성향도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4. 만년의 여유로운 생활
최석정은 벼슬길에서 물러난 후에 주로 소래산 기슭에서 생활하였다.소래산은 시흥과 인천을 경계로 하는 지역의 산이다. 지금의 인천대공원 근처에 위치해 있다. 이 산이 원래는 인천의 진산(鎭山)이었다고 한다. 그가 은퇴 이후에 생활하면서 남긴 이 칠언율시(七言律詩) 한수를 보기로 한다. 이 시작품을 통해 그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자연과 더불어 한가롭게 보내면서 느끼는 정서와 즐거움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한평생 살아온 노곤함과 피로감이 한 수의 시에 응축되어 있는데 감상할수록 여운이 남는 작품이기에 소개해 본다.

 

소래산 기슭은 서식할 만한 곳이어서 蘇山之下可棲遲
늙지는 않았어도 한가로워 기쁜 것은 差喜身閑未老時
바람결에 야학 소리 편안하게 들려오고 野鶴風前多逸響
눈 내린 뒤 강둑 매화 두어 가지 피어선데 江梅雪後有疏枝
두보 아닌 학력으로 성벽 어찌 이루랴만 學非杜預那成癖
양웅의 글을 보다가 기발함을 알았으니 字到楊雄漫識奇
오솔길에 오가는 사람 적다 탓할 일 아니요 村逕不嫌來往少
이 중에 진짜 즐거움은 본심을 알아가는 것 箇中眞樂只心知

 

<참고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명곡집(明谷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긍익(李肯翊).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이규경(李圭景).
「경세유표(經世遺表)」, 정약용(丁若鏞).
「청선고(淸選考)」
「곤륜집(昆崙集)」
「당의통략(黨議通略)」
「인물지」(충청북도, 1987)
「진천군지」(진천군지편찬위원회, 1994)
「내고장 전통가꾸기」(증보판)(진천문화원, 1999)
「한국인물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중앙M&B, 1999)
「문화유적분포지도」-진천군(충북대학교 박물관, 2001)
「(국역) 상산지(常山誌)」(상산고적회, 2002)

<참고 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의 융합인재, 수학자 최석정 (KISTI의 과학향기 칼럼, KISTI)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409161&cid=60335&categoryId=60335
– [네이버 지식백과] 최석정 [崔錫鼎] – 현실 가능한 정책을 제시한 소론 정치가(인물한국사)
– YTN 사이언스 : 위대한 과학기술인_최석정 편 (2016-06-20 )
– 수학동아.2018.3월호
– 석사논문 [최석정 생애와 학문]. 윤명선.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역사교육전공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