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태(洪世泰)


홍세태(洪世泰)                                                            PDF Download

 

홍세태(洪世泰, 1653∼1725)는 무인 집안에 출생한 중인 신분으로 역과에 합격한 역관이었다. 하지만 그는 통역 보다는 학식과 문장이 뛰어나 글재주를 인정받아 시문을 짓는 일로 세상에 알려지고 쓰임을 받았다. 한때는 승문원 제조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하였으며, 그의 시문은 당대 으뜸이란 평을 받았다.

그는 젊어서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조성기(趙聖期), 최창대(崔昌大) 등 양반 사대부들과 사귀고 스스로 중인들의 시를 모아 『해동유주(海東遺珠)』편찬하였다. 관직으로는 제술관,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 남양감목관 등을 역임하였다. 1682년에는 일본 통신사를 따라가 일본에서도 문명(文名)을 떨쳤다.

1653년(1세)
효종 4년, 12월 7일, 무관 벼슬을 지낸 홍익하(洪翊夏)의 3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릉 유씨(劉氏) 유천운(劉天雲)의 딸이다. 자는 도장(道長), 호는 창랑(滄浪), 혹은 유하거사(柳下居士)를 사용하였으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나이 들어 이씨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부인과는 2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여덟이나 나았으나 모두 자신보다 일찍 세상을 하직하여, 양자를 들였다.

1675년(23세)
식년시(式年試) 잡과(雜科)에 응시하여 한학관(漢學官)으로 뽑혔다. 이즈음 서울 삼청동에 살았는데, 이웃에 살던 김창협(金昌協, 農巖), 김창흡(金昌翕, 三淵), 김도수(金道洙), 이하곤(李夏坤)등과 사귀었다. 그들과 같이 시를 쓰고 낙송시사(洛誦詩社)에서 활동하였다.

 

1682년(30세)
통신사 윤지완(尹趾完)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부산, 쓰시마 등지를 지나면서 지를 지었다. 지은 시는 모두 유고집(『유하집』)에 실려 있다. 김창협은 나중에 친구가 일본에 간 것을 기념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농암집』제4권)

少年賓日到咸池 젊은 시절 바다 멀리 일본에 사신으로 가
海上停舟徐福祠 바닷가 서복 사당 그 앞에 배를 대고
織取扶桑五色繭 부상 나무 오색 고치 길쌈하듯 시를 지어
東皇與博錦囊詩 봄 신의 조화와 시재(詩才)를 겨루었지

 

홍세태는 당시 부사 이언강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통신사에 참여하였다. 특별한 임무는 없었으나 일본에 가서는 제술관과 시문창화(시문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시를 짓는 일)를 전담하였다. 후대의 통신사에 배치된 ‘서기’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홍세태는 일본에서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히토미 카쿠잔 등과 교류하였다.

그는 후지산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玆山標日域 이 산이 일본 땅의 표지가 되니
嵂兀聳奇峰 가파르게 높이 솟은 기이한 봉우리로다.
逈擢鴻濛色 멀리서 보면 우뚝 솟아 몽롱한 빛이 있고
冥棲神聖蹤 어두운 곳에는 신성한 자취가 있다네
四時留白雪 네 계절에 항상 흰눈이 남아 있고
八葉列芙蓉 여덟 이파리 늘어선 부용과 같네.
時有五雲起 때때로 오색구름 일어나
去從東海龍 동해의 용을 따라서 가네.

 

1688년(36세)
봄,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손자인 신정(申晸)이 강화유수 재직 중에 사망하여 이해 봄에 여주에서 장사를 지냈다. 홍세태는 신정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고 그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친 인연이 있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장례식장에 농암 김창협이 말을 보내와, 그 말을 타고 찾아가 김창협을 만난 뒤,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농암집』제3권)

期君何太久 그대를 기다린지 얼마만인가
昨夕始登門 어제저녁 비로소 이곳에 왔네
馬鬣新觀葬 말 위에서 잠깐 장례식을 참관하고
漁舟後問源 고깃배 타고와 무릉도원 물었네
聊同江上望 강 위 경치를 함께 구경하고
且盡雨中樽 비 내리는 가운데 술잔 기울여
浮世參差事 허망하고 잡다한 세상일이야
寥寥未暇論 다 잊고 논의할 틈이 없네

다음해 해서(海西) 지방을 유람하였다.

 

1693년(41세)
개성에 있는 박연폭포(朴淵瀑布)를 유람하고 시를 남겼다.

2년 뒤,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그린 시를 지었다.

 

1696년(44세)
중국 연경에 다녀왔다. 친구 김창협은 이러한 그를 위해서 송별하는 시를 다음과 같이 지어주었다.(『농암집』제4권)

看君詩膽大於山 그대의 시적 담력 산보다 큰 걸 보니
未信身軀六尺孱 육척의 작은 몸집 믿기지가 않는구나
東土彈丸妨縱筆 탄환처럼 작은 나라 붓 놀리기 어려우니
故須夷夏壯游還 장한 뜻 품에 안고 중국 유람 다녀오게
……
燕市千秋說慶卿 연경에는 대대로 경경 얘기 전해오니
古今豪傑幾霑纓 눈물 흘려 갓끈 적신 고금 호걸 몇몇인가
知君詩律增悲壯 알괘라 그대 시는 한결 더욱 비장해져
便作高家擊筑聲 그 옛날 고점리(高漸離)의 격축 소리 같으리라
……
老驥雄心不盡無 준마는 늙었어도 장한 마음 남아 있어
側身關塞夢長途 변방의 멀고먼 길을 달려가는 꿈을 꾸네
金臺碣石愁雲外 시름겨운 구름 너머 연경으로 떠나가는
送爾悲歌擊唾壺 그대 위해 송별 노래 감격하며 부르노라

 

1698년(46세)
2월, 청나라 호부시랑(戶部侍郞) 박화낙(博和諾)이 와서 의주(義州)에서 조선의 시를 요구하자 조정에서 박세태를 추천하여 응대하게 하였다. 박세태는 이때 이문학관(吏文學官)이라는 직책에 임명되어 대응하였다.

이후 어머니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가 1702년에 복직하였다.

 

1702년(50세)
이즈음에 백연봉(白蓮峯) 아래에 서재를 지어 유하정(柳下亭)이라 편액(扁額)을 달고 거처하였다.

이후 1705년에 둔전장(屯田長), 1710년에 통례원인의(通禮院引義) 등에 임명되어 근무하였다.

 

1711년(61세)
일본 통신사로 가는 조태억(趙泰億)을 전송하면서 시를 지어 주었다.

 

1712년(62세)
청나라에서 관리들을 파견하여 조선의 관리들과 함께 백두산에 올라 국경을 새로 정하고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돌아갔다. 박세태는 이러한 내용을 그 작업에 참관한 역관(譯官) 김경문(金慶門)에게 듣고「백두산기(白頭山記)」(『柳下集』)라는 이름으로 기록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백산(長白山)을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이라 하는데, 중국과 우리 두 나라에서 산 위의 두 강을 놓고 경계를 정했다. 임진년(1712년) 여름에 중국에서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 등 몇 사람을 보내서 직접 가 보고 경계를 정했다.

이 산은 서북쪽에서 오다가 뚝 떨어져 큰 평원(平原)이 되었고 여기에 와서 갑자기 우뚝 솟았으니 그 높이는 하늘에 닿은 듯하여 몇 천만 길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그 절정에는 못이 있는데 사람 머리에 숨구멍 같이 되어서 그 주위는 20∼30리나 되고, 물빛은 새까매서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다.

한여름에도 얼음과 눈이 쌓여서 바라보면 은으로 만든 바다와 같다. 산 모양은 멀리서 바라보면 독을 엎은 것 같고, 올라가 보면 사방은 높고 중간은 쑥 들어가서 마치 동이를 젖혀놓은 것 같다. 밖은 희고 안은 붉은 돌이 사면으로 벽처럼 에워쌌는데, 북쪽으로 두어 자쯤 터져서 물이 넘쳐나가 폭포가 되었으니 그것이 곧 혼동강이다. (중략)

목극등은 물이 두 갈래로 갈라진 사이에 앉아서 말하기를, ‘여기는 분수령(分水嶺)이라 할 만하니 비석을 세워 경계를 정해야 하겠다. 그런데 토문강(土門江)의 원류가 중간에 끊어져서 땅속으로 흐르므로 경계가 분명치 않다.’ 하고, 이에 비석을 세우고 쓰기를, ‘대청(大淸)의 오랄총관 목극등은 명령을 받들고 변경(邊境)을 조사하다가 여기에 이르러 자세히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 되고 동쪽은 토문강이 되었으므로 분수령에 돌을 세우고 글을 새겨 기록한다. 강희(康熙) 51년 5월 15일이다.’ 하고, 우리나라 사람에게 이르기를, ‘토문강의 원류가 끊어진 곳에는 하류까지 연달아 담을 쌓아서 표시를 하라.’ 했다.” 하였다.

이 말은 내가 직접 그때에 목격한 역관(譯官) 김경문(金慶門)에게서 얻어들은 것이니 거의 믿을 만하다. 토문강은 두만강이다.

옛날에 윤관(尹瓘)이 속평강까지 국경을 넓히고 그 일을 기록한 비석이 아직까지 그곳에 서 있는데 김종서(金宗瑞) 때에 와서 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한 것을 나라 사람들이 분하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윤관의 비를 가지고 따져서 경계선을 정하지 못한 것은 그 일을 맡은 사람의 잘못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함경도(咸鏡道)는 모두 말갈(靺鞨)의 땅이었다. 지금에 와서 경계를 정한 지가 오래되었고 우리 영토 안에 있는 폐사군(廢四郡)도 가끔 외적의 침범이 있어서 모두 이민을 시키고 비워두었는데 하필이면 다시 쓸데없는 땅을 가지고 외국과 분쟁을 일으킬 것이 무엇이냐? 지금의 국토는 금구(金甌)와 같이 완전하게 되었으니 아무튼 손상을 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1713년(61세)
서부주부(西部主簿) 겸 찬수랑(纂修郞)에 임명되어 『동문선(東文選)』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중인들의 시집인 『해동유주(海東遺珠)』를 편찬, 간행하였다. 이 시집에는 박계강(朴繼姜), 유희경(劉希慶), 최기남(崔奇男), 최승태(崔承太) 등 총 48명의 시 230여 수가 수록되어 있다.

 

1714년(62세)
숙종이 사용하는 병풍의 <서호십경(西湖十景)>에 시를 지어 넣었다. 조씨에게 시집간 작은 딸이 죽어 제문을 지었다. 송라도(松羅道) 찰방(察訪)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음해 제술관에 임명되었다.

홍세태는 딸 둘을 두었는데 큰딸은 이씨에게 시집을 갔다. 그 딸이 죽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제문을 썼다.

“슬프도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자식을 잃은 슬픔을 겪어서 마음이 상한 지 오래다. 네 동생을 잃은 뒤에는 몸이 마르고 정신은 사그라져 넋이 다 망가졌다. 살려는 생각이 없었지만 죽지 않았던 것은 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또 네가 죽은 것을 보았으니 내가 다시 이 세상에 무슨 미련이 있겠느냐? 마땅히 빨리 사라져야 시원할 것이다. 네 어미에게 듣자니, 너는 병이 위중해지자 흐느껴 눈물을 흘리며 어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구나.

‘아버지를 못 보고 죽으려니 눈이 감기지 않아요. 어머니는 내가 죽으면 반드시 죽으려 할 텐데, 그러면 저 어린 다섯 아이는 어떡해요? 어머니 죽지 마세요.’

아아, 설사 목석과도 같은 사람일지라도 이런 말을 들으면 혼절할 텐데, 하물며 그 부모는 어떻겠느냐? ……아아, 너는 이제 가면 돌아오지 않겠구나. 잠시라도 머물러 위로는 부모를 모시고 곁으로는 아이들을 이끌며, 이 술과 음식을 맛보고 평소처럼 기쁘게 웃어 보일 수 없겠느냐?”

 

1716년(64세)
의영고(義盈庫) 주부(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바로 파직되었다. 다음해 충청도 수영(水營)이 있던 영보정(永保亭)을 방문하여 시를 지었다.

1719년(67세)
박세태가 재능은 많으나 궁핍하게 사는 것을 애석하게 여긴 이광좌(李光佐)가 추천하여 울산(蔚山) 감목관(監牧官)이 되었다. 이후 수년간 장기(長鬐) 목관(牧館)에서 지내면서 주변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지를 지었다.

1722년(70세)
제술관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남양 감목관이 되었다. 7월, 청나라 사신에게 시를 지어 주었다.

1724년(72세)
11월, 그동안 상자에 보관 중이던 자신의 시문을 모두 꺼내 정리하였다. 번잡한 것을 버리고, 줄여서 부(賦) 3수, 시(詩) 1627수, 문(文) 42수를 총 10권으로 편집하고, 자서(自序)를 지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문장을 모두 정리한 뒤, 부인에게 맡겼다.

1725년(73세)
1월, 사망하였다. 홍세태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며, 8남 2녀의 자녀가 모두 자신보다 앞서 죽는 불행을 당하였다. 이러한 불행은 그의 시에 깊은 영향을 미쳐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730년
사위 조창회(趙昌會)가 문인 김정우(金鼎禹) 등과 함께 박세태가 편집한 10권과 시 4권을 보충하여 14권으로 문집(『柳下集』)을 발간하였다.

1770년
조정에서 홍세태의 아들 홍광서(洪光緖)를 불러 군문(軍門)관련 직책에 임명하였다.

 

<참고자료>

고경식, 「홍세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박헌순, 「유하집 해제」, <한국고전종합DB>, 2000

장진엽, 『홍세태의 사행문학 연구』, 연세대 석사논문,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