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진(朴奎鎭,1858-1934)


박규진(朴奎鎭,1858-1934)                                    PDF Download

 

규진(1858-1934)은 전라남도 화순 출신으로 조선시대 말엽과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전통시대지 식인이다.  최익현(崔益鉉)과 정의림(鄭義林)에게서 한문과 성리학을 배웠으며,  나라를 잃어버린 암울한 시대에 살면서 은둔생활을 하는지식인들과 널리 사귀고, 화순지역의 유명정자와 서원에 많은 시를 남겼다.

1858년(1세, 철종 9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호는 외당(畏堂)이다. 젊어서 면암(勉庵 ) 최익현(崔益鉉, 1834~1907)과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1845~1910)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최익현은 이항로의 제자로 화서학파에 속하며,  정의림은 기정진의 제자로 노사학파에 속한다.   정의림은 정재규(鄭載圭),  김석구(金錫龜)와  함께 노사의 3대 제자로 알려졌는데, 특히 화순지역에 제자들이 많았다.  1868년 경에 기정진의 제자가 된 정의림은 1886년 경에 200명이 넘는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박규진은 이러한 정의림에게 학문을 배웠다.

1893년(36세, 고종30년) 겨울에 스승 정의림이 화순군 춘양면 칠송리(지금의회송리會松里) 칠송부락에서 원을 지었다.  그러한 건물을 짓게 된 이유를 정의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해 봄에 칠송마을에 강당터를 정하고 가을에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겨울 12월에 완공을 하였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위인(爲人)의 도리를 하고자 한다면 학문이 아니고 는불가능하다.  학문의도는 스승과 벗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니 스승과 벗에게 친히도를 묻는까닭이다.   배우는자는 또한 그 장소가 없을 수 없다. 상서(庠序)와  학교는 원래 윤리를 밝게하고 가르침을 세우는 곳이지만 삼대 이후에는 도를 따름이 전과 같이 않게 되었다.   또한 시장이 성곽 안에 있어서 다투고 싸울 일이 많아지고, 적막하고 한가한 취미는 적게 되었다.  이것이 이 서원을 일으키게 된 연유이다.”

 ( ⌈일신재집 ⌋4권,영귀정기)

 

그는 ⌈논어 ⌋에서 ‘영귀(詠歸)’라는 이름은 따 영귀정(詠歸亭) 이라하였는데,⌈논어⌋ 를 보면 공자가 어느날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랬더니 증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늦은 봄에 가벼운 옷을 입고 젊은이 대여섯 사람과 아이들 예닐곱 명 정도를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하고 기우제를 지낸 언덕에 올라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既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詠而歸 。 )”

( ⌈논어 ⌋선진편)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러한 고사에서 두글자를 얻어 영귀정이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  정의림은 영귀정에 성인 아홉명의 영정을 모시고 본격적으로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박규진은 영귀정이 완성되던 날 그곳에 들려 다음과 같은 시를 짓고 기쁨을 함께하였다.

정자를 지으니 이름난 이 땅은 더욱 신비스럽구나.
(亭築名區地秘靈)

그 이름을 기수(沂水)의 맑은 물 한줄기에서 취했네.
(取諸沂水一原淸)

젊은이와 아이들을 데리고 바람을 쐬고 목욕하니 봄날이 길구나.
(冠童風浴春長在)

증점이 비파로 천기를 연주하니 만고의 소리로구나.
(曾琵天機萬古聲)

(⌈외당유고 ⌋)

 

이러한 글을 보면 박규진은 이미여러해 전부터 정의림의 문하에서 학문을 계속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정자를 세운 그 뜻이 아주 오랜 공자시대의 그 뜻과 같음을 노래하고 그러한 전통이 자신이 사는 화순에서 이어짐을 대견스러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1894년(37세, 고종31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화순군 능주면 우봉리에 사는 홍우용(洪祐鏞, 1872~1941)이 23살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하여 장릉 참봉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나라가 혼탁하여 관직에 나가는 일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홍우용은 박규진과 동문으로 정의림의 제자였다.

1905년(48세, 광무9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최익현, 정재규, 기우만등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다 해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최익현은 다음 해에 의병을 일으켰다가 관군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된 뒤,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박규진은 최익현에게도 배웠으니 스승의 죽음은 서쪽 멀리 떨어진 화순에도 들려왔을 것이다.

1910년(53세, 융희4년)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상실하였다. 스승 정의림은 의병 운동의 실패와 국권상실의 절망감으로 일체의 외부활동을 중시하고 두문불출하다 10월 10일 별세하였다.  정의림은 사후에 그가 지은 영귀정 옆에 세워진 칠송사(七松祠) 배향되었다.  나중에 제자들 여러명도 이 칠송사에 배향되었는데 박규진의 이름은 배향 인물에 올려지지 않았다.  정의림의 제자들은 화순지역의 곳곳에 흩어져 강학활동을 열심히하여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특히 배석면(裵錫冕),  배치묵(裵致黙)과 같은 제자들은 100여명이 넘는 문도를 두었는데 박규진의 강학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929년(72세, 일제시대), 이즈음 능주에 사는 홍우용이 금오산 아래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우산정사(牛山精舍)라 하였다.  또 역락정(亦樂亭) 지었다.  박규진은 자연과 학문을 벗삼아 은거하는 홍우용을 찾아 그 정자를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시( ⌈외당유고 ⌋次牛山精舍韻)를남겼다.

사방에 물이 흐르고 가운데 봉우리 높게 서있네
(四圍水曲一高岑)

아름다운 나무가 숲을 이루니 땅 가득 그늘뿐
(佳木成林滿地陰)

도끼가 조금도 범하지 못하니 온통 새로 자란 나뭇가지
(少無侵斧多萌蘖)

많은 책들도 함께 있어 마음을 잡아 끄는구나.
(亦有藏書是貫心)

은둔하며 살다가 연기와 구름 잠긴 것만 보니
(幽居但見烟雲鎖)

한가한 이곳에서 세월 깊어 가는걸 어찌알리.
(閒處安知歲月深)

세상사 들리지않아 마음만은 즐거우니
(外事不聞中樂意)

현인과 군자가 서로 찾기 좋은 곳이네.
(賢人君子好相尋)

박규진은 또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우봉리에 있는 침수정(枕漱亭)에도다음과같은글을남겼다.( ⌈외당유고 ⌋謹次枕漱亭韻)

그윽한 정자가 작은 티끌도 허락하지 않고,
(幽亭不許上微塵)

물과 대나무가 맑고 한가로운 별세계의 봄이네.
(水竹淸閒別地春)

하늘의 밝은 달은 일생동안  읊조리던 자취요,
(霽月一生吟弄跡)

높은 풍격은 백세 동안 다스리던 몸이네.
(高風百世濟康身)

선현의 향기가 시로 남아 옛스럽고
(先賢芬馥題詩古)

후학들이 가슴에 품은 회포는 강연으로 새롭네
(後輩襟期講道新)

깨끗이 씻고 갈아 얻음이 있음을 알겠으니,
(澄汰磨礱知有取)

이 아름다운 이름은 단지 돌과 물 때문만은 아니라네.
(佳名非獨石流因)

1934년(77세, 일제시대)에사망하였다. 유집으로1994년에간행된 ⌈외당유고(畏堂遺稿) ⌋가있다.

<참고자료>
오인교, 南道정자기행(2553)-화순우산정사(牛山精舍),<한국매일>, 2015.10.6
이종범편, 화순역사인물을활용한컨텐츠개발용역결과보고서 , 2014.11.2
권수용, 근대기화순유학의부흥과정의림(鄭義林)의역할, 화순 역사인물을활
용한컨텐츠 개발용역결과보고서 ,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