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순(洪一純)


홍일순(洪一純)                                                              PDF Download

 

홍일순(洪一純, 1804년∼1856년)은 조선시대 후기의 유학자로 15세(1818년) 때에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양자가 되었다. 어려서 부친과 절친한 오희상(吳熙常, 1763∼1833)에게 글을 배웠으며 나중에 임헌회(任憲晦), 신응조(申應朝), 김평묵(金平黙) 등과 교류하였다.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고 성리학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시흥현령(始興縣令), 과천현감 등을 역임했으며, 저서로 『오곡집(鰲谷集)』4책을 남겼다.

 

1804(1, 순조 4)
아버지 홍우필(洪禹弼)과 어머니 음성박씨(陰城朴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박씨는 박상한(朴相漢)의 딸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일대)이며, 자는 헌문(憲文), 호는 오곡(鰲谷)이다.

1810(7, 순조 10)
나중에 양부가 된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돈녕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홍직필은 아들 홍일한(洪一漢)이 있었는데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딸은 민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1814(11, 순조 14)
홍직필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다. 1822년에는 장흥고봉사, 1838년에는 이조 재학, 장악원주부, 황해도도사, 1840년에는 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818(15, 순조 18)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양자(養子)가 되었다.(⌈매산집(梅山集)⌋) 홍직필의 자는 백응(伯應)·백림(伯臨), 호는 매산(梅山)으로 서울 출신이다. 병마절도위 홍상언(洪尙彦)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현감 홍선양(洪善養)이고, 아버지는 판서 홍이간(洪履簡)이다. 1801년 사마시에 응시하여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회시에서 낙방한 뒤에는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오희상(吳熙常, 1763∼1833)과 오랫동안 사귀었는데 그로부터 성리학의 여러 주제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저서로 매산집(梅山集)이 있다.

홍일순은 어려서 양부와 절친한 박윤원과 오희상에게 글을 배웠으며 나중에 임헌회(任憲晦), 조병덕(趙秉悳), 신응조(申應朝), 김평묵(金平黙) 등과 교류하였다.

홍직필은 홍일순이 어렸을 때의 일을 이렇게 시로 표현한 적이 있다. 시 제목은 ‘一純朝出江門不還終夕苦佇因之爲詩’(⌈매산집⌋권2)으로 그 내용은 ‘일순이 아침에 강문(江門)으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므로, 저녁 내내 애타게 기다리며 시를 짓다.’이다. 아이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절절이 드러나 있다.

 

飛雪層冰江上村
눈 날리고 층층이 얼음이 언 강가 마을에

癡兒訪道丈人門
어리석은 아이가 도를 찾아 어른의 문하에 찾아갔네

白頭扶杖倚閭望
백발에 지팡이 짚고 마을 어귀에서 바라보니

夕鳥下庭山日昬
저녁 새 뜰에 내려오고 산의 해는 어둑어둑 해지네

 

홍일순에게 글을 가르쳤던 오희상은 당시 노량진 부근에 거처를 정하여 살고 있었다. 거기로 글을 배우러 간 아들 홍일순을 기다리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홍직필이 아들을 기다리는 마음을 시로 담은 문장이 또 한편 있다. 제목은 「待兒, 즉 ‘아이를 기다리며’(⌈매산집⌋권2)이다.

 

送子蘆漪去
아들을 노의선생(오희상)에게 보냈는데

淹遲反面行
돌아와 얼굴을 보여주는 걸음이 더디구나

冉冉黃昏近
어느덧 황혼이 가까우니

依依初月生
은은히 초승달 떠오르네

簷端白雲宿
처마 끝에는 흰 구름 머물고

庭際草蟲鳴
뜨락에는 풀벌레 우는구나

倚杖勞凝望
지팡이 짚고 애써 응시하며

衡門夕不扃
저녁에도 사립문 닫지 않노라

부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홍일순은 경학과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태극(太極), 도기(道器), 명덕(明德) 등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예를 들면 명덕론(明德論)에 대해서는 명덕이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보고, 허령불매(虛靈不昧)하고 이치를 갖추어 온갖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 마음(心)이라고 하였다. 이기설은 전적으로 율곡 이이(李珥)의 학설을 따랐다. 그는 이기론에 대해서, 리(理)의 근원도 하나이고 기(氣)의 근원도 하나이므로, 기가 이를 떠나지도 못하고 이도 기에서 떠나지 못한다고 설명하였다.

 

1844(41, 헌종 10)
선공감역(繕工監役)으로 제수되었다. 양부 홍직필이 당상관으로 공조참의에 임명되고, 또 나중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45(42, 헌종 11)
1월, 초사(初仕)로 가감역(假監役)에 임명되었다. 이후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시흥현령(始興縣令) 등을 역임했다.

1848(45, 헌종 14)
과천현감(果川縣監)을 지냈다.

1851(48, 철종 2)
양부 홍직필이 대사헌에 임명되고, 다음해 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852(49, 철종 3)
양부 홍직필은 이 해에 용인(龍仁) 충열사(忠烈祠)의 원장이 되었다. 7월에는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홍직필은 6월부터 설사증을 앓다가 7월 17일에 경기도 노호(鷺湖)의 노의정사(蘆漪精舍)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77세 였다.

1856(53, 철종 7)
이 해에 향년 53세로 사망하였다. 저서로 『오곡집(鰲谷集)』4책이 있다.

오곡집』은 8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필사본이고, 서문과 발문이 없다.

제1권에는 시 98수, 서(書) 10편이 실려 있는데 아버지 홍직필을 비롯하여 오희상, 조병덕(趙秉悳), 신응조(申應朝), 임헌회(任憲晦) 등 여러 학자들에게 인심(人心), 도심(道心), 태극, 도기(道器), 이기(理氣), 명덕(明德), 예설 등에 관하여 문답한 것이다.

제2권부터는 서 107편, 서(序) 1편, 제문 9편, 묘지 1편, 가장(家狀) 3편, 잡지(雜識) 1편, 그리고 부록으로 제문 2편, 묘갈명·묘지명·연설(筵說)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1885년(고종 22년)년에 조정에서 심순택이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이번에) 지평에 추증(贈職)한 신(臣) 심의덕(沈宜德)은 연전에 특별히 추증하여 포상을 하였는 바, 그는 일찍이 문경공(文敬公) 홍직필(洪直弼)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연원(淵源)이 순정(純正)하고 예학(禮學)에 해박하여 후학들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고 현령(縣令) 홍일순(洪一純)은 문경공의 아들로 가학(家學)을 계승하여 독실하게 실천하였는데, 끝내 현감에 그쳐 그 깊은 학문을 펴지 못하여 사림(士林)이 지금까지도 애석해하고 있습니다.

(중략) 이처럼 순정한 학문과 행실은 마땅히 특별한 상전(賞典)이 있어야 합니다. 심의덕에게는 도헌(都憲)과 좨주(祭酒)를 더 추증하고 홍일순과 이의조에게는 특별히 참의(參議)와 좨주를 추증하여 장려하는 성상의 뜻을 보이시면 실로 밝은 시대의 풍속을 세우는 정사에 빛이 날 것이기에 아룁니다.”

(⌈승정원일기⌋) 이에 임금은 건의한대로 실행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 , ⌈매산집⌋
전종헌, 「홍일순」,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이종덕, 「홍일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8
이종덕, 「오곡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