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본(徐有本, 1762년∼1822년)


 

서유본(徐有本, 1762년∼1822년)                      PDF Download

 

유본(徐有本, 1762년∼1822년)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실학자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서학과 북학에 정통한 유련(柳璉), 서형수(徐瀅修) 등에게 배웠다. 영조, 정조시대에 대대로 고관을 지낸, 소위 경화세족(京華世族)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북경에서 전해지던 고증학, 천문학, 기하학, 역학(曆學), 상수학(象數學), 율려학(律呂學) 등 실용적인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정조에서 순조로 왕권이 넘어가는 시기에 집안이 몰락하면서 관직을 떠난 그는 부인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 ⌋, 동생 서유구의『임원경제지』가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새로운 학문을 모색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1762년(1세,영조38년) 2월 6일, 조선후기의 명문 가문인 서씨 집안 서호수(徐浩修, 1736~1799)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혼원(混原), 호는 좌소산인(左蘇山人)이다. 선조 임금의 사위 서경주(徐景주, 1579∼1643)와 목사 서정리(徐正履)가 그의 먼 조상이다. 그 뒤 숙종때에 이르러,  조상서 종태(徐宗泰)가 영의정으로 있었을때는,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이
나 될 정도로 위세를 떨친 집안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서종옥(徐宗玉, 1688∼1745)은 1725년(영조1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이조좌랑, 대사성, 세자시강원보덕, 황해도관찰사,  대사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호조판서등을역임했다.

서종옥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네 아들은 차례로 서명익(徐命翼), 서명응(徐命膺), 서명선(徐命善), 서명성(徐命誠)이다. 서명익의 호적상의 손자가 서유본이다 . 서명익은 아들이 없이 일찍 죽어서 서명응의 둘째 아들 서호수가 서명익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서유본에게 사실상 친 할아버지는 서명응이다.
호적상 둘째 작은 할아버지가 되는 서명응(1716∼1787)은 영조때, 대사헌, 황해도관찰사, 수군절도사,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또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1728년~1791년)은 정조가 등극하는데 공헌을 한 공신으로 정조 재위 초기에 삼정승을 거친 인물이다.  1763년증광문과에 을과 급제하여, 이조참의, 대사성, 대사헌,승지등을 역임하고 선조 임금의 특별한 신임을 받아 예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등 요직을 두루거쳤다.
아버지 서호수(徐浩修)는 1764년 칠석제(七夕製)에 장원하고, 급제한 뒤, 홍문관 부교리, 도승지(都承旨), 대사성, 대사헌, 규장각직제학, 이조·형조·병조·예조 등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학문으로는 당시 서학이라 불리던 천문학과 수학, 기하학에 정통했다.
서유본의 작은 아버지 되는 서형수(徐瀅修)는 1783년(정조7) 증광문과에을과로급제한뒤, 광주목사, 청나라사은부사, 이조참판, 경기관찰사등을역임하였다.
당시 중국 청나라에서 전해진 고증학과 경학에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규장각 편찬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나중에 18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조카인 서유본은 그에게서 글을 배우는 등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63년(2세,영조39년)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이해에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임명되었다. 영조 임금은 그의 부친(서종옥)을 추모하여 그 다음날 교리로 특별 승진을 시켰다.  둘째 작은 아버지 서명응은 이해에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 판의금,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1735합격,  1751년에 호조좌랑, 의흥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며, 1754년에 증광문과에 합격하여 병조좌랑, 정언, 함경도 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대사간, 승지,부제학, 이조참의,황해 감사 등을 거쳤다.

1764년(3세,영조40년) 동생 서유구(徐有榘)가 태어났다. 아버지 서호수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는데,  맨 위 장남이 서유본이고 그 다음이 서유구다.  서유구(1764년∼1845년)는 나중에 출세하여 이조판서, 대제학까지 올랐는데,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지은 실학자로 이름을 날렸다.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은 이해에 대사헌, 한성 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은 홍문관 관원들이 올린 상소문으로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부에 유배되었다.  하지만곧 풀려나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이해에 아버지 서호수가 칠석제에서 장원을 하였다.

1765년(4세,영조41년) 아버지 서호수가 식년문과에서 장원급제를하였다.  곧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되었으나 남해에 유배되었다.  하지만 다음해에 홍문관 부교리로 특채 되었다.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이조참판, 홍문관제학, 대사헌, 부제학, 도승지등에 임명되었다.

1767년(6세,영조43년)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예조참판,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다. 이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양을 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갑산 부사로 좌천되었다.  하지만 다음해에 다시 예조참판으로 복귀하였다.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에 부교리, 승지를 역임하였다.

1769년(8세,영조45년)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형조참판, 청나라 사신 동지정사, 한성 판윤, 홍문 관제학, 형조 판서등을 역임했다.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잠시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 되었는데, 곧 이어 이조참의, 대사성, 대사헌, 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이조참판이 되었다.

1773년(12세,영조49년) 이해 부인을 맞이했다. 부인은 대대로 명망이 높은 소론가 문인 이씨 집안 이창수(李昌洙)의 딸이다.  둘째 할아버지 서명응이 추진한 결혼이었다.  할아버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버지 이창수를 따라 ⌈소학 ⌋과 ⌈시경 ⌋을 읽고 총명한 이씨의 딸을 손자 며느리로 삼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서유본보다 3살 많은 부인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년∼1824년)는나중에조선에서 유일한실 학자이자 경제학자로 이름이 알려진다.  그녀는 시집와서 7살 된 시동생 서유구를 직접가르쳤다.  장모, 즉빙허각의 어머니는 유씨(柳氏)인데,  유씨 집안 역시 실학과 고증학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집안이었다.  빙허각 이씨는 서유본과 사이에 4남 7녀를 두었으나 3남 5녀를 일찍 잃었다. 서유본은 그녀의 학문적인 재능을 인정해 주었고 평생을 학문적인 동지로 지냈다.

1775년(14세,영조51년)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전년에 파직 되었다가 이해 10월에 병조판서로 복귀하였다.  11월에 이조 판서가되었다.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세손(정조)을 핍박하고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홍인한(洪麟漢) 등 일파를 탄핵하였다.  덕분에 세손의 대리청정이 시행되었는데,  정권을 잡은 세손에 의해 서명선은 공신으로 예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76년(15세, 정조즉위년)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평안감사, 규장각 제학에 임명되었다.  정조 즉위의 일등공신이 된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은 임금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수어사(守禦使), 총융사(摠戎使)를 겸임하고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또 우참찬,  판돈녕부사등을 역임했다.  아버지 서호수가 도승지에 임명되어, 임금의 측근이되었다.  진귀한 책들과 북학과 관련된 소식을 전했다.  서호수는 1770년에 ⌈동국문헌비고 ⌋편찬에 참여하였는데 , 규장각 직제학에 임명되어 규장각의 여러 편찬사업을 주도하였으며,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의 기초가 되는 ⌈어제춘저록(御製春邸錄) ⌋의 간행을 주관했다. 후에 이조, 형조, 병조,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임금의 은밀한 부탁으로 청나라 서적의 수입을 추진하였으며,  청나라 사신을 다녀오면서 ⌈연행기(燕行紀) ⌋를 지었다.

1777년(16세, 정조1년)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다음해에 좌의정,  그 다음해에는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779년(18세, 정조3년) 모친상을 당하였다.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영의정에 올랐다.  인정받은 그는1780년에 일시적으로 한직에 물러났다가 곧바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고,  1783년에는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동생 서유구는 용주(蓉州, 지금의 용산 혹은 마포 부근)에서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을 모시고 농학서 ‘본사(本史)’ 의 집필을 도왔다.  동생은 이즈음부터 ‘풍석(楓石)’ 이란 호를 쓰고 ‘풍석암서옥(楓石庵書屋)’ 이란 서재를 만들었다.

1781년(20세, 정조5년) 서유본은 동생 서유구와 함께 작은 아버지 서형수의 지도를 받아 본격적으로 과거 공부를 시작했다.  또 작은 아버지를 통해서 중국에서 유행하는 고증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 등에서 사용하던 관각체(館閣體)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는데, 수준이 매우 높았다.  없으나 아버지와 친한 유금(柳琴,  1741년∼1788년)에게 학문을 배웠다. 유금은 아버지 서호수가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갈 때 막객(幕客)으로 따라 간 사람으로,  본명이 유련(柳璉)인데 가야금을 좋아하여 유금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사람이다.  그는 또 서유본의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수학에 밝았으며, 천문학과 율력, 서화, 금석, 전각 등의고증학적인 분야에 일가견을 갖춘 학자 관료였다. 특히 당시 조선에 전해진 기하학을 좋아하여 기하실(幾何室)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1783년(22세, 정조7년) 작은 아버지 서형수(徐瀅修)가 이해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광주 목사와 영변부사 등에 임명되었다.  서유본은 이해에 처음으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즈음 변려문(騈儷文) 공부에 힘썼다.  그는 나중에 의고문(擬古文), 팔가문(八家文) 등에 관심을 가지고 글공부를 하는데 모범으로 삼기도 하였다.
스승  박지원(朴趾源)은 이때 47세였는데, 1765년(29세)에 처음으로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여,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박지원은 서유본이 문장에 관심이 많을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 ⌈연암집 ⌋贈左蘇山人)를 지어 주고 훈계하였다.

“세상 사람들을 살펴보니, 남의 문장을 칭찬하는 자는 꼭 ‘문장은 양한(兩漢)이요, 시는 성당(盛唐)이요.’ 하더군.  비슷하다는 말은 이미 진짜가 아니라는 뜻이네.  한나라, 당나라가 어찌 또 있겠는가? 우리 나라 습속은 옛  말투를 즐겨,  촌스러운 그 문장을 당연하게 여기네.  듣는 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이 없더군 .……  잔재주 따위는 우선 버리게.  조용히 내가 한 말을 들어보게.  그 마음이 아마도 너그러워질 것이네.…… 걸음을 배우려다가 도리어 기어 다니고 ,(서시西施의) 찌푸림을 흉내 내면 단지 추해질 뿐이네.  이제 알 것이네.  그린 계수나무는 생생한 오동나무만 못하다는 걸.  초(楚)나라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라도 결국은 남의 의관(衣冠)을 빌린 것이네.…… 제 속이 속된 줄은 생각 안하고, 아름다운 붓과 벼루만 애써 찾더군.  문장 짓는데,  육경의 글자로만 점철하는건,  마치 사당에 몸을 의탁한 쥐와 똑같네. 훈고(訓詁)의 어휘를 주워 모으면, 못난 선비들은 입이다 벙어리가 되지.……  여름철 농사꾼이 허술한 제차림은 잊고, 갑자기 갓끈과 허리띠로 겉치장 한셈이네.  바로 눈앞에 참된 흥취가 살아있는데,  하필이면 먼 옛 문장을 취하는가? 한나라 당나라는 지금 세상이 아닐 뿐더러, 우리 민요는 중국과 전혀 다르네.  반고(班固)나 사마천(司馬遷)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들은 결코 모방하지 않겠지.  새 글자는 창조하기 어렵더라도,  자기 생각은 마땅히 다 풀어놓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옛 방식에만 구속당하여, 허겁지겁 붙잡고 매달리는가?  지금 시대가 천박하다고 생각지말게.  천년 뒤에는 당연히 고귀하게 여길 걸세.……  한창 젊을 적에 노력한다면,  문장으로 천하를 호령할 수  있을 것이네.”

이러한 조언을 받 은서유본은 “나는 지금 사람이니 지금 문장을 쓰겠다. 옛 것을 모방해봐야 무엇 하겠는가?” 라고 하며 자신이 그동안 즐겨 배웠던 옛 문장체를 버리고 새로운 각오로 자신의 학문을 모색했다.

1786년(25세, 정조10년) 동생 서유구가 생원시에 합격하다. 스승 박지원이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  이후 1789년에 평시 서주부(平市署主簿),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1791년에 한성 부판관, 1792년에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에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에 양양부사등을 역임하였다.

1787년(26세, 정조11년) 이해 12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사망하였다. 향년72세였다. 서명응은 정조시대 최고의 학자로 평가되는 인물로 규장각의 창설을 주도한 공이 컸다.  또 서씨 집안에 ‘농학’을 가학으로 전수했는데, 저술로 ⌈보만재총서⌋가 있다.

1790세(29세, 정조14년) 동생 서유구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분관(分館)에 취임하였다.  다음해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별세하였다. 향년64세였다.

1794년(33세, 정조18년) ⌈진주순난제신전(晋州殉難諸臣) ⌋을 집필하였다.  1592년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던 주요 인물13명, 부수적인 인물 20명,  모두 33명의 전기를 정리한 기록이다.  도입부를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호남과 영남의 경계가 나뉘는 곳에 진주는 중요한 요충지로 위치한다.  이는 병법에서 말하는 반드시 지켜야 할 땅인 것이다. (중략)
바둑에서 한 점을 얻음으로써 전체 승부를 판가름하는 것과 같이 한성을 지킴으로써 천하의 안위가 달려있게 된다.  이것을 아는 자라야 비로소 병법을 더불어 말할 수 있다. 호남은 우리나라의 천부(天府)의 땅이고 나라의 근본이다. 임진년에 섬나라 도적들이 쳐들어와 봉홧불이 이르러 이 나라 수 천리를 돌고 잿더미가 된 속에서도 호남만이 무사했던 것은 진주 사람들이 길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1797년(36세, 정조21년) 동생 서유구가 순창(淳昌) 군수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서유본은 성균관시에서 지은 주문(奏文, 임금에게 아뢰는글)으로 정조 임금의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대 과에는 계속 낙방을 하였다.

1799년(38세, 정조23년) 1월,  부친 서호수(徐浩修)의 상을 당하였다. 그는 아버지 서명응이 전한‘농학’을 계승하여 조선시대 농학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해동농서⌋를 지었다. 이 책 은전8권으로 이루어졌는데, 농무(農務), 과류(瓜類), 채류(菜類), 과류(果類), 목류(木類), 초류(草類), 잠상(蠶桑), 복거(卜居), 목양(牧養), 조양(造釀),구황(救荒), 벽온(酸瘟), 치약(治藥), 단약(丹藥) 등으로 나누어 서술되었다.
서호수는 아들들에게 어느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재주가 없어 아마도 이 귀중한 책들은 뒷날 깨진 간장독을 바르는데 쓰게 될 것이다.”

서호수는 자신이 흥미를 가지고 모은 서적들 중에는 천문, 역산(曆算), 음악, 기하학 등 특이한 분야의 서적이 많았는데,  자신의 네 아들 중에 그러한 자신 의학문을 이어줄 마땅한 자식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부친의 말은 서유본과 서유구, 그리고 서유본의 부인 빙허각에게 항상 경계의 말이 되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남긴 책들을 모두 읽고 그 바탕위에 생활에 꼭 필요한 지식의 백과사전을 만들어 내는 일이 그 이후 서씨 가문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1804년(43세,순조4년) 작은 아버지 서형수가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  동생 서유구가 형조참의에 임명 되었다가 ⌈정조실록 ⌋의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동생은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제학, 형조 판서,  전라도 관찰사, 호조판서, 병조판서,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1805년(44세,순조5년) 가을에 음보(蔭補, 조상의 덕으로 얻은 벼슬)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서유본으로서는 처음 갖게 된 관직이었다.  이해 스승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향년 69세로 사망하였다.  작은 아버지 서형수(徐瀅修)는 경기 관찰사가 되었다.

1806년(45세,순조6년) 이해에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서 벽파 계열인 우의정 김달순 등이사약을 받았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작은 아버지 서형수가 관직을 박탈당했다.  당시 할아버지들과 부친이 모두 돌아가신 상황에서 작은 아버지는 가문의 중심이었다.  그의 관직 박탈은 바로 가문의 몰락을 의미했다.  정조 임금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던 서씨 가문은 순조 시대로 접어들면서 차츰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작은 아버지는 이후 전라도 홍양현 등지에서 18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하게되었다.  1817년에는 추자도에 유배되었으며, 나중에(1823년)  전라도 임피현으로 옮겨져 그 곳에서 사망했다.
서형수는 조카들인 서유본과 서유구에게 큰 영향 을미쳤다.  그 는‘필유당(必有堂)’이란 서재를 만들었는데 그 이름은 ‘자손 가운데 반드시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나올 것이라는 의미’ 였다. 서유본은 작은 아버지가 지은 필유당에 대해 필유당기(必有堂記) 에서 이렇게 썼다.

“대나무가 우거진곳의 서쪽에는 나무를 엮어 가리개를 만들고,  가리개 안쪽에는 땅을 정리하여 서재를 지었다.  조용하고 깨끗하여 마치  산 속에 있는 듯한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내 작은 아버지 서형수 선생께서는 그 안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서적을 비치해 놓으시고 자제들이 그 곳에 모여 학문을 익히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곳의 편액 을‘필유(必有)’라고 하였다.  옛날에 정기(丁覬)라는 사람이 만권의 책을구입하고는 ‘내 자손 중에 틀림없이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서재 이름을 이렇게 지은 뜻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해 서유본 역시 자신에게 닥쳐올 후환을 피하기 위해 사직했다.  서울 외곽 인동호 행정(지금의 용산)으로 내려가 아내 빙허각과 함께 차밭을 일구며 생활을 꾸려갔다.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독서와 저술에 힘썼다.  원래 높지 않은 관직생활 이었기 때문에 그는 벼슬이나 정치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릴 수 있었다.

한때는 또 전라도에 내려가 그곳에서 남의 집을 빌려 살면서 경학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사기 ⌋공부를 하거나 작은 아버지 서형수의 필유당(必有堂)에서 동생 서유구 등과 고문을 짓 는공부를 하기도하였다.  그리고 부친이 남긴 과업을 이어서 기하학과 역학(曆學), 상수학(象數學), 율려학(律呂學) 등을 5년여에 걸쳐 연구하였다.

부인 빙허각은 갑자기 궁핍해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밭일을 하면서 틈틈이 자신이 경험한 생활 지식과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실학 서적의 여러 내용을 종합하여 여성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정리했다.  당시  서유본의 집안에는 수많은 책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돌아가신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의 서재죽 서재(竹西齋)의 책들, 서유본의 서재불 속재(不俗齋)에 보관된 책들, 또 시동생 서유구가 모은 태극실(太極室)의 책 등이 있었다.  가정 백과사전 ⌈규합총서(閨閤叢書) ⌋(1809년)는 그러한 환경을 배경으로 완성 되었는데,  그 외에도 빙허각이 당시 지은 글들이 ⌈빙허각시집 ⌋, ⌈청규박물지 ⌋등에 담겨있다.  빙허각은 ⌈합총서 ⌋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나는 동호(東湖)의 행정에 살면서 집안에서 밥을 짓고 반찬 만드는 틈틈이 사랑에 나가 옛 글을 읽었다.  그 가운데 일상 생활에 꼭 필요한 내용과 산야에 묻혀 있는 모든 글 들을 구해 보았다.  손길 닿는 대 로펼쳐보고 견문을 넓히고 또 무료함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총명함은 무딘 문장만 못하다.’라는 옛 사람의 말을 떠올렸다. 기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잊어 버렸을때 도움이 되겠는가? 그래서 모든 글을 보고 가장 중요한 말을 가려 뽑아 적고 혹시 따로 내 생각을 덧붙여 다섯 편의 글( ⌈규합총서 ⌋)을 지었다.”

남편 서유본이 또 이렇게 썼다.

“내 아내가 여러 책에서 뽑아 모아 각각 항목별로 나누었다.  시골의 살림살이에 요긴하지 않는 것이 없다. 더욱이 초목, 새, 짐승의 성미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하다. 내가 그 책 이름을 지었는데 ⌈규합총서 ⌋라고 하였다.”

동생 서유구도 이해 1월 18일 상소문을 올려 홍문관 부제학의 자리에 서물러나 낙향하여 은둔하였다.  서유본과는 달리 고위관직에 오래 있었던 서유구는 그 만큼 더 신변의 위험을 느꼈으며 더욱 철저하게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후 터전을 옮겨다니며 20년 가까이 농사를 지으며 학문에 힘썼다.  그는 실학에 조예가 깊었고,  다양한 분야에 통달하여 문장도 잘 지었는데,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 ⌋, ⌈번계모여집(樊溪耄餘集)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을 저술하였다. ⌈임원경제지 ⌋는 113권 52책으로 백과 전서이며 생활과학 서적이다.  전원 생활을 하는 사람들,  특히 선비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기술,  그리고 기예와 취미 관련 지식을 모두 모았다. 16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800여종의 문헌을 참고하여 당시 알려진 생물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집대성한 거작이었다.

1810년(49세,순조10년) 이해 여름부터 주희가 지은『의례경전통해집전집주(儀禮經傳通解集傳集註)』를 공부하였다.  이후 9년간 그 책의 요점을 뽑아 『주례(周禮)』와 『예기(禮記)』를 부기한『삼례소지(三禮小識)』 6권을 만들어 1819년(순조19년)에 편찬하였다.  그는 주희를 본받아 『의례(儀禮)』를 매우 중시하였다.

1820년(59세,순조20년) 『주자가례』를 연구하였다.  주희가 주장한 내용을 초기와 후기로 나누어 정리한 다음에, 그 차이점을 검토하여 주자의 정론(定論)을 확정한 다음『가례소지(家禮小識)』 2권을 편찬했다.  이외에도 역사서를 읽기 위해서는 역대관제(官制)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관제연혁고(官制沿革考)』2권을 지었다.

1822년(61세,순조22년) 7월 14일에 갑자기 병을 얻어사망하였다.  동생 서유구가 묘지명( 백씨좌소산인묘지명伯氏左蘇山人墓誌銘)을 썼다.  부인 빙허각은 절명사(絶命詞)를 짓고 사람들과 모든 관계를 끊고,  머리를 빗지 않고, 얼굴을 씻지 않으며,  자리에 누워 19개월 만인 1824년 66세로 남편의 뒤를 따랐다. 문집으로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 ⌋ 8권 4책이 있다. 문집에는 시문, 서간문, 애제문(哀祭文),  잠명문(箴銘文) 등 문장 외에도 상제론(喪祭論), ⌈독명사 교사지(讀明史郊祀志)⌋, ⌈진주순난제신전(晉州殉難諸臣傳)⌋, ⌈김인의영가전(金引儀泳家傳 )⌋(정조시대 대표적인 천문역산가天文曆算家 김영金泳 전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또 ⌈주자가례 ⌋, ⌈의례경전통해집전집주(儀禮經典通解集傳集注) ⌋등을 연구하여 ⌈삼례소지(三禮小識) ⌋ 6권과 ⌈가례소지(家禮小識) ⌋2권을 편찬하였다.

서유본은 관직에만 매달리지 않고 자유스럽게 자신이 하고자하는 공부를 추구했다.  청나라에서 전해진 북학이 조선 에알려지기 시작한 시대에 살면서 그는 새로운 학문의 수용에 열성이었고, 실용적인 생활의 지식을 모으고 집대성하는데 힘썼다.
그가 남긴 문장 중에는 조선후기 과학사의 연구에 중요한 것들이 적지 않다.  경학공부도, 실사구시적인 연구를 추구하였는데, 주희의 학설을 검토하여 옳고 그름을 분석하여 그 본 뜻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는 고증학적인 입장에서,  당시 사람들이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근거 없이 주희를 헐뜯고 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참고자료>
-박지원, ⌈ 贈左蘇山人⌋, ⌈연암집 ⌋
-심경호, ⌈서유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심경호, ⌈좌소산인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구만옥, ⌈서유본의학문관과자연학담론⌋, ⌈한국사연구⌋ 166,2014
-임유경, ⌈서유본의 <진주순난제신전(晋州殉難諸臣)>연구, <어문학> , 2004
-한민섭, ⌈조선후기가학의한국면- 서명응일가의문학을중심으로⌋, ⌈한국어문학국제학술포럼학술대회 ⌋, 200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