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응수(楊應秀, 1700-1767)


 

양응수(楊應秀, 1700-1767)                                 PDF Download

 

암 이재(李縡, 1680-1746)의 적전(嫡傳)이다. 이재는 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문신이다. 그의 문하에 미호 김원행, 역천 송명흠, 녹문 임성주 등 출중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미호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은 조선 후기의 집권 계층인 노론의 혁혁한 가문의 후손으로서 학통을 잇는 존재가 되어 조야(朝野)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학자의 지위에 있었다. 그는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되어 종조부 김창협(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역천 송명흠(1705-1768)은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인 스승 이재, 윤봉구(尹鳳九),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동국 18현의 한 명인 송준길(宋浚吉)의 현손으로, 동생 송문흠(宋文欽)과 더불어 당시 송씨 문중의 쌍벽으로 불리웠다.

녹문 임성주(任聖周, 1711-1788)는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정조 즉위 후 동궁을 보도(輔導)하고 지방관을 지내기도 했지만 평생을 재야에서 학문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철학은 일원론적 구조 위에서 정초되고 있으며, 이기를 기일원론적 관념으로 통일함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결정(結晶)을 이루었다. 현상윤은 <조선유학사>에서 임성주를 조선 6대가의 한명으로 꼽고 있다.

김원행, 송명흠, 임성주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이재 문하에서 나왔지만 정작 이재 말년의 유훈을 받고, 그 의발을 온전히 지킨 수제자는 이들이 아니고 백수 양응수이다. 양석승(楊錫升)은 <白水集序>에서 이재의 적전[寒泉之嫡傳]이라고 하고 있으며, 이상영(李商永)은 <묘갈명>에서 ‘연원단적(淵源端的) 직접한천(直接寒泉)’이라 하였고, 유언집(兪彦鏶, 1714-1783)은 <행장>에서

‘주자 문하에서 성리에 대해서는 북계(北溪) 진순(陳淳)이 으뜸이라고 하는데 이재 문하에서 성리에 있어서는 양응수가 으뜸이다’

고 적고 있으며, 이상영은 <묘갈명>에서 이재 문하의

‘박성원(朴聖源, 1697- 1767), 유언집, 송명흠, 김원행 등도 성리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을 적에 양응수의 정확하면서도 분명한 조예를 높이 평가했다’

고 적고 있다.

양응수는 스승이 죽자 심상(心喪) 중의 일들을 <축장일기(築場日記>로 자세하게 남기고 있는데 스승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잘 느낄 수 있다. 또한 백수(白水)라는 양응수의 호는 이재가 지어준 것인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이재가 말년에 주연을 펼친 후에 제자들에게 시를 읊도록 했는데, 양응수의 시는 고준한 기상이 있었다. 이에 이재가 흥에 겨워 붓을 들어

‘얼큰한 취기에 경설을 논하고 센 수염(白鬚) 휘날리며 시를 읊는데 이것이 궁핍한 유자가 뜻을 얻은 것일세.’

라고 써서 양응수에게 주자, 동문들이 양응수를 백수(白鬚)라고 불렀다. 후에 양응수가 호를 부탁하자 이재가 백수(白水)라는 호를 주었는데, 이는 양응수가 백호(白湖)에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이재가 양응수를 허여한 당시의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유언집이 <행장>에서 밝히고 있다.

본관은 남원(南原)으로 자는 계달(季達)이고 호는 백수(白水)이다. 순창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는 승의랑(承議郞) 처기(處基)이며 어머니는 강화최씨(江華崔氏)로 휴지(休之)의 딸이다.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꿋꿋하게 학문을 연마하였다. 후에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던 이재가 한천에서 강학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이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사제지간으로서 이재와 양응수는 마치 부자지간과 같아서 다른 제자들이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755년(영조 31)에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고, 이어 익위사부수(翊衛司副수)로 옮겨졌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오로지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에만 전념해 「사서강설(四書講說)」 등 성리에 관한 정통한 저작과 논설들을 남겼다.

유언집이 <행장> 말미에 성리설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양응수의 글이 좋은 길안내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의 문집에는 성리설에 대한 내용들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문집 내 비중으로 보더라도 양응수의 <백수집>은 김원행의 <미호집>, 송명흠의 <역촌집>, 임성주의 <녹문집>에 비하여 성리에 관한 논설들이 더욱 많다.

양응수는 스승 이재와 마찬가지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는 낙론(洛論)을 지지하고, 호론(湖論)을 배척하였다. 그의 학설은 이재의 ‘일리이기(一理二氣)’설을 계승한 것이라고 한다. 양응수의 일리이기설에 기반 한 인물성동이론의 입장은 그가 스승의 심상 기간의 일들을 일기형식으로 남긴 <축창일기>의 정묘년 정월 17일의 기록에서 대강을 엿볼 수 있다.

이철하(李徹夏)가 이재의 영정에 조문한 후에 양응수를 방문하여, 근래에 심설에 대한 논의들이 벌어져서 호우(湖右, 한원진과 윤봉구) 쪽은 마음은 선악이 있으며 미발시에도 숙특(淑慝)의 종자가 있다고 하고, 호좌(湖左, 채지홍, 이간) 쪽은 마음은 본래 선하며 불선한 것은 구각혈기(軀殼血氣) 때문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진다.

양응수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두 설이 모두 편중되었다. 이재 선사의 리일기이(理一氣二)의 설이 확실한 정론이다. 마음의 리는 하나이지만 기는 나누어 말할 수 있는데, 본연지기(本然之氣)는 명덕(明德)으로 주자의 “마음의 본체는 인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 이것이다. 혈기지정영(血氣之精英)은 “정신이 발동하여 지각이 된다(神以發知)는 것”으로 진안경이 “모두가 선한 것은 아니다. 마음이 발동하면 불선한 생각이 나오기 쉽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호좌(인물성동론)는 본연지기가 순선하다는 것은 보았지만 혈기정영은 반드시 선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호우(인물성이론)는 혈기지정영을 마음의 본체로 여겨서 본연지기가 순일하고 부잡하다는 것을 모른다. 따라서 리는 하나이고 기는 둘이다(理一氣二)라고 해야 마음의 체단이 원전하면서도 구분이 명확해진다. 이 입장은 성현의 말씀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

이런 설명을 듣고 이철하가 “네, 네! 잘 알겠습니다.” 했다.

저서로는 <백수문집(白水文集)> 30권 17책이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