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행(金元行) 3


김원행(金元行) 3                                                         PDF Download

 

김원행(金元行, 1702년∼1772)은 조선시대 후기의 관료이자 학자였다.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 작은할아버지 김창흡(金昌翕)에게 글을 배웠다. 기호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고자 한 그는 18세기 중반 이후 낙론의 핵심적 논의를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강학 활동을 통해 19세기로 이어지는 기호 낙론 학설의 중심을 이루었다.(박학래 409) 저서에 『미호집(渼湖集)』이 있다. 제자 중에 실학자 황윤석(黃胤錫, 1729∼1791)과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있다.

 

 

1702년(1세, 숙종 28년)

12월 29일, 죽취 김재겸(金濟謙)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다. 김재겸은 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필형(必亨), 호는 죽취(竹醉).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아버지는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다. 어머니는 박세남(朴世楠)의 딸로, 작은할아버지 김창흡(金昌翕)에게 글을 배웠다.

김원행의 가문은 안동김씨로 원래 영남 안동이 본거지였으나 16세기 중반 경기도 양주 석실로 이주한 뒤 재경 사족들과 혼인을 통해서 경제적 기반을 다져 조선후기 대표적 문벌로 알려지게 되었다.(김인규 176)

김원행은 아들이 없이 사망한 숙부 김숭겸(金崇謙)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현손(玄孫, 고손자)이며, 농암 김창협(金昌協)의 양손자이다. 김원행의 호는 미호(渼湖)이다.

 

1708년(7세, 숙종 34년)

윤3월, 할아버지 김창협(金昌協)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어려서 종조부(從祖父, 할아버지의 형이나 동생, 즉 큰할아버지 혹은 작은할아버지)인 김창흡에게 배웠다. 김창흡은 김원행의 작은 할아버지다. 이어 낙론계의 종지를 잇고 있는 도암 이재(李縡)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고제자가 되었다.(김인규 186)

김창흡은 김원행에게 글을 가르칠 때 나눈 대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홍대용의 「미상기문」)

 

“너는 독서를 몇 번하면 외울 수 있는가? ”

“우공 읽기를 다섯 번해서 겨우 외울 수 있었습니다.”

“천하의 서적에 어찌 한번 읽고 외울 수 없는 것이 있겠는가? 어찌 한번 외우고 종신토록 잊는 것이 있겠는가?”

 

김원행의 암기력은 할아버지 김창흡을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암기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김인규 187)

 

1716년(15세, 숙종 42년)

홍귀조(洪龜祚)의 딸 남양 홍씨와 혼인하였다.

 

1719년(18세, 숙종 4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721년(20세, 경종 1년)

12월, 비난의 상소를 받고 원래 할아버지 김창집(金昌集)은 거제로 귀양을 갔다. 본가의 부친 김제겸(金濟謙)은 울산으로 유배되었다.

 

1722년(21세, 경종 2년)

3월, 형 김성행(金省行)이 무고로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4월, 김창집이 사사(賜死)되었다. 8월, 김제겸이 사사(賜死)되고 가족들이 사방으로 유배되었으나 김원행은 양자로 입적되어 있어 위기를 모면하였다. 친형 김성행과 친아우 김탄행은 경종의 독살을 꾀한 죄목으로 처형되었다.(辛任士禍 신임사화)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뜻을 두었다. 이후 생모 송부인의 금산 유배지에 가 있으면서 『맹자』 공부에 전념하였다.

 

1725년(24세, 영조 1년)

3월, 김창집과 생부 김제겸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이후 억울하게 피해를 입든 자손들을 우대하는 조치가 있었으나 과거 응시를 단념하고 은거하였다.

생부 김제겸은 조성복(趙聖復)·김민택(金民澤)과 함께 신임사화 때 사망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이해에 관작이 복구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생부의 저서로는 『죽취고(竹醉藁)』가 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이즈음 청풍, 제천, 단양 일대를 유람하였다.

 

1732년(31세, 영조 8년)

이해 12월, 양어머니 박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다음해 12월, 친어머니 송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1736년(35세, 영조 12년)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1737년(36세, 영조 13년)

6월, 「명덕설의문(明德說疑問)」을 지었다. 7월, 자신의 시문 초고에 서문을 지었다. 다음해 10월, 아들 김리안(金履安)의 혼사에 격려하는 글을 지어 주었다.

 

1740년(39세, 영조 16년)

김창집이 복관(復官)되었다. 김원행은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훗날 제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김원행의 용모는 다음과 같았다.(『미호언행록』「遺事」)

 

“몸이 다부지면서 살집이 있었고 얼굴은 크고 원만하였으며, 신체는 윤기가 흐르고 순수한 데가 있었다. 눈빛은 사람을 쏘아보는 듯 바르면서도 넉넉하였다. 큰 입술은 붉었고 구렛나루가 있었으며 목소리는 크고 엄하였다. 손바닥은 두텁고 손가락은 짧았는데,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아 서면 작았으나 앉으면 키가 커보였다.”

 

1744년(43세, 영조 20년)

영주의 부석사와 백운동서원을 거쳐 안동의 반학정, 중대사, 괴산의 화양동 등을 유람하였다. 이어 청주를 거쳐 홍주에 가서 종제 김양행(金亮行)을 만나보러 갔다. 가는 길에 이봉상(李鳳祥), 김의행(金毅行)도 함께 모여 간월도, 안면도 등을 유람하였다.

다음해(1745년 을축년) 미음으로 올라가 석실서원에 머물면서 후진양성에 힘쓰기 시작했다.

이즈음 어린 홍대용(洪大容, 1731년∼1783년)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김원행은 홍대용의 할아버지인 홍귀조의 사위였다. 즉 김원행은 홍대용의 5촌 고모부였다. 홍대용은 석실서원에서 과거시험 준비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학문을 연마했다. 김원행은 홍대용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이 실심(實心)이 없을까 근심할 뿐이다. 실심이 진실로 확립되었다면 무엇을 이루지 못할 것인가? 오직 이 실심의 확립과 확립하지 못함은 그 사람에게 달렸다. 다른 사람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나 자신을 위해고 남을 위하는 사이에서 그 시비득실의 귀결처를 깊이 살피고, 거짓을 짓는 것에 편안하게 여겨 스스로 소인으로 빠지지 않는다면, 나 자신을 위하는 진실에 대해 장차 힘쓰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능히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미호집』10권 「答洪大容」)

그리고 또 그는 홍대용에게 “학문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곧 민생일용(民生日用)의 일에 나아가 배울 것이요, 사정에 어두워서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없다면 참된 학문이 아니다”(『미호언행록』)라고 실용의 정신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1746년(45세, 영조 22년)

조광조와 송시열을 모신 도봉서원에 다녀왔다. 다음해 여주를 거쳐 오대산, 강릉 등을 유람하고, 설악산에 있는 할아버지 김창흡(金昌翕)의 영시암 유허(遺墟, 자취가 남아있는 터)를 돌아보았다.

 

1750년(49세, 영조 26년)

익위사 위솔, 종부시 주부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해 역시 익위사 익찬,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52년(51세, 영조 28년)

개성 화담서원을 거쳐 평양, 성천의 강선루, 안주의 백상루, 영변의 철옹성, 묘향산 등을 다녀왔다. 가을에 손아래 처남 송문흠(宋文欽)이 사망하였다.

 

1753년(52세, 영조 29년)

이해부터 임금이 병으로 앓아눕자 왕세자인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였다. 조헌은 사헌부 지평에 재차 임명되었으나 상서하고 사직하였다. 송도에 다녀왔다.

이때 올린 상서문 일부가 『영조실록』(79권, 4월 11일자)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신은 하늘과 땅 사이의 한 궁민(窮民,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일찍이 혹독한 화(禍)를 당하여 지극한 아픔이 가슴속에 가로질러 있습니다. 황야에 귀양 가 있을 때에 형체는 보존되었지만 정신은 이미 죽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영원히 농부가 되어 남은 생애를 마치려 했는데 십수년전에 외람되게도 임금님의 임명을 받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또 작년부터 갑자기 승진하게 되었는데 조정의 추천은 더욱 분수에 지나치기가 그지없습니다. 신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감히 이런 영광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보통사람으로서 아무 연고가 없는 사람의 말인 것이요, 신과 같은 처지의 일개인에 있어서는 귀한 사람들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 신의 가문이 겪은 당일의 화(禍)를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낳아준 할아비인 충헌공 김창집은 조정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마음속으로 순국할 것을 맹세하여 태평할 때나 험난할 때나 한결같이 절개를 지켜 왔습니다. 그런데 흉악한 무리들에게 미움이 누적된 탓으로 악독스런 칼날이 삼대까지 모두 미치게 되었으므로 가문이 완전히 망하고 뒤집어져 세상 사람들도 슬퍼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도 지금까지 억장이 무너지고 피눈물을 삼키고 있었는데, 신은 불효한 탓으로 변고가 망극하던 때를 당하여 가슴과 배를 가르고 스스로 저승으로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그런데 이미 원통한 죄를 밝혀 누명을 씻는 은혜를 받은 뒤에 일부 거짓말하는 도적들의 말이 멋대로 현혹시키고 있는데도 신이 또 한 마디도 따지지 못한다면 이런 손자가 장차 어떻게 세상에 얼굴을 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저하(邸下, 왕세자)께서는 속히 저를 버리시고 명단에서 삭제시킴으로써 밭 가운데 오두막에서 생애를 끝마치게 하소서.”

 

1754년(53세, 영조 30년)

2월, 서연관에 임명되었다. 3월 김원행은 사직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7월, 석실서원의 제자들과 뱃놀이를 하고 시를 지었다. 12월, 장악원 정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해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곧 체차(遞差, 어떤 직위에 있던 관리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일)되었다.

 

1756년(55세, 영조 32년)

장령에 재차 임명되고, 서연관이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해 가을에 홍락신(洪樂莘)에게 훈계의 글을 지어 주었다.

이해에 올린 상서문이 『영조실록』(32년 3월 12일자)에 이렇게 적혀있다.

 

“지금 산림(山林)에는 명망 있는 유학자며, 덕망 있는 선비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진실로 저하(邸下, 왕세자)께서 큰 뜻을 능히 힘쓰시어 더욱 실학(實學, 실용적인 학문)에 근면하시며 정령(政令, 정치적 명령과 법률)과 도술(道術, 방도와 술수)을 순수하게 요순(堯舜)과 삼대(三代, 하은주 시대)를 모범으로 삼아 당대의 어진 선비들을 심복시킬 마음이 있다면, 한때의 숱한 인재들이 누군들 양양하게 기를 펴고 아름다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신과 같은 사람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존재입니다. 저하께서 또한 무슨 돌보고 아낄 것이 있어서 버림을 받아 자정(自靖, 스스로 편안)하려는 보잘것없는 바람을 이루어 주지 않으시고 감히 받들 수 없는 처지에 성대한 예를 이처럼 헛되이 하십니까?”

이러한 상서문에 대해서 당시 왕세자는 ‘즉시 빨리 올라와 나의 미치지 못하는 바를 돕도록 하라’고 답하였다.

 

1757년(56세, 영조 33년)

4월,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우암선생의 묘 이장에 제문을 지었다. 다음해 5월, 제자 이완(李浣)에게 격려의 글을 지어 주었다. 9월, 사위 홍락순의 『아송(雅誦)』에 글을 지어 주었다. 가을, 도봉서원에 다녀왔다.

 

1759년(58세, 영조 35년)

이해 왕세손(정조)이 책봉되었다.

2월, 좌권독(左勸讀)에 임명되고, 별유(別諭)가 내려졌으나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세자가 대리 중이어서 대신이 아니면 상소를 할 수 없는 법이라 상소가 되돌려졌다.

아들 김리안이 진사가 되어 궁에 들어가자 임금이 김원행을 올라오도록 재촉하였다. 재차 상소하였으나 임금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임금은 왕세손 교육을 위해서 김행원을 불렀으나 그는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5월, 시강원 겸 진선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전에 올린 상소를 읽어본 뒤 답을 내렸다. 이에 석교까지 나아가 아이를 시켜 글을 올리고 사례한 뒤에 돌아왔다.

 

1761년(60세, 영조 37년)

8월, 장악원 정에 제수되고, 9월에 집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 10월, 김봉한(洪鳳漢)의 추천으로 통정계(通政階)에 올랐다. 11월, 공조 참의, 성균관 좨주에 임명되었으나 글을 올려 사직하였다.

 

1763년(62세, 영조 39년)

2월, 찬선 송명흠(宋明欽)이 명령을 받고 입조(入朝)하여 김원행을 초치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올라오도록 하였으나, 누차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다음해 박세채(朴世采)를 문묘에 모실 때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곧 취소되었다. 다음해 가을 보은 현감으로 있는 아들 김리안을 만나러 가는 길에 송명흠과 함께 속리산에 다녀왔다.

 

1765년(64세, 영조 41년)

3월, 괴산 화양동에 다녀오는 길에 다시 속리산을 유람하였다.

 

1767년(66세, 영조 43년)

1월, 부인상을 당하고, 『정해내상기(丁亥內喪記)』를 지었다.

 

1768년(67세, 영조 44년)

손아래 처남 송명흠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9월, 찬선에 임명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였다. 이에 상소의 어구를 문제 삼아 임금이 해임시켰다.12월, 홍봉한의 요청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었다.

 

1770년(69세, 영조 46년)

옥계폭포를 유람하였다. 다음해 동춘 송준길의 유허인 월성초당, 옥천의 이지당에 다녀왔다.

 

1772년(71세, 영조 48년)

7월 7일, 사망하였다. 9월, 양주 도산에 장사 지냈다.

『영조실록』(119권, 영조 48년 12월 30일)에 다음과 같은 졸기가 실렸다.

“성균관 좨주(祭酒, 종3품의 관직) 김원행이 사망하였다. 김원행의 자(字)는 백춘(伯春)으로 안동 사람이다. 충헌공 김창집의 손자인데, 문간공 김창협의 후손으로 입적하였다. 출생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고 기개와 도량이 빼어나 선배들이 모두 국가의 그릇으로 인정하였다. 1722년부터는 산골에 물러가 살면서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한 학문에 마음을 썼다. 대개 김창협이 남긴 사업을 이어받아 행한 것이다. 성(性)과 명(命)의 근본을 통찰하고 이기(理氣)의 묘(妙)를 깊이 탐구하였는데, 조용히 깊고 깊이 생각하더니 각각 그 극(極)을 이해하였다. 평소에 하는 사업이 공평하고, 정의롭고 확실하며, 의리(義理)를 구별함이 엄격하고 명쾌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한 세상 유학자들의 중심이 되었고 관직에 발탁되어 벼슬이 공조 참의·좨주·찬선에 이르렀다. 임금의 사랑과 대우가 융숭하여 관직 임명장을 자주 내렸는데, 매번 사양하며 종신토록 나오지 않으니, 조야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지금에 이르러 졸하였는데, 나이는 71세이며 『미호집(渼浩集)』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1799년에 문집이 간행되었다. 1805년(순조 5년)에 ‘문경(文敬)’으로 시호를 받았다.

김원행의 성리학 사상, 즉 인물성론, 심설, 명덕설은 낙론계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박윤원(朴胤源, 1734∼1799), 오희상(吳熙常, 1763∼1833), 홍직필(洪直弼, 1776∼1852), 전우(田愚, 1841∼1922) 등이 그의 학설을 계승하였다.(박학래 435) 또 그의 ‘실심(實心)’과 실용의 학문 정신은 제자 홍대용에게 전해져 조선 실학으로 꽃을 피웠다.

 

<참고자료>

『영조실록』119권.

「김원행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http://www.krpia.co.kr/)

김인규, 「김원행의 학문과 석실서원에서의 강학활동」, 『동방학』22, 2012

박학래, 「미호 김원행의 성리설 연구-18세기 중반 락론(洛論)의 심성론에 유의하여」, 『민족문화연구』71,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