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원(李根元: 1840∼1918)


이근원(李根元: 1840∼1918)                               PDF Download

 

기도 양평(楊平) 출신인 그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문중(文仲), 호는 금계(錦溪)이다.  이양흡(李養翕)의 아들인 그는 1866년(고종3)에 27세의 나이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벽계로 찾아가 문인이 되었고,  이항로의 별세 후에는 동문이었던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默)과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를 사사(師事)하여 화서학파(華西學派)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지평면 월산리에 금리정사(錦里精舍)를 열고 일직당(一直堂)을 세워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면서 일제(日帝)에 항거하는 의병 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으며,  직접 의병(義兵)을 일으키는데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학문과교육에전념하면서정신적항쟁을하여많은애국지사를배출한유학자이다.

1884년에 변복령(變服令)이 선포되자,  그는<화이의복변(華夷衣服辨)>을 지어,  의복이 바뀌면 정신적 가치 기준도 달라지는 법이라고 역설한 바있고, 1910년에는 일제가 회유책으로 주는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했다가 헌병 분견소로 불려가서 1주일 동안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성리설(性理設)에 대한 시각은 유중교를 옹호하는 한편,  유중교와 이항로의 성리설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밝히는데 있었다.

이항로가 별세한 뒤 심설(心說) 논쟁 등의 문제로 유기일(柳基一)과 홍재구(洪在龜)가 유중교를 비난하자,  동문(同門)인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항와(恒窩)  유중악(柳重岳) 등과 함께 유중교를 옹호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명덕(明德) 을리(理)로 파악하였으며, 심합리기(心合理氣)를 말하면서 심(心)에서 리(理)가 기(氣)의 주재(主宰)가 되는 것을 심의 본체 모습이라 하여 그 당위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학문 태도의 기본은 경(敬)과 의(義)를 기본 규범으로 삼는 거경론(居敬論)에 두었다.

화서학파의 도학적(道學的) 기본정신인 의리론(義理論)에 대해서는, ‘나아가서 나라를 부지하는 것[出而扶持]’과 ‘물러나서 나라를 부지하는 것[處而扶持]’이 동일한 선상에 있 는의리라고 보고 자신은 그 후자의 시각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유인석에게 직접 몸이 병들어 나가지 못한다는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 이듬해 1906년(병오) 사람인 정혁선(鄭赫善)이 그를 무함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일진회를 해치고 보름 후에 의병을 출동 시키려한다.”

고 고변하는 바람에 여읍병참(驪邑兵站)으로 소환되어 갔다.  이때 그는

“거의(擧義)는 오늘날의 당연한 일이다.  다만 지혜와 힘이 미치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허명(虛名)을 잘못 입어 이지경을 당하였으니 실로 부끄러울 뿐이다.”

라고 하며 아들 준학(俊學)을 대동하고 가서 고변한 정혁선과 대질을하였다.  그 과정에서

“천하의 일은 있는 것을 속여서 없다고 할 수 없는데,  지금 무슨 증거나 꼬투리가있느냐?”

라고 호통을 쳐서 혐의를 벗고 돌아 왔던 일도 있다.
그 뒤 1910년(경술)에 일본은 은사금(恩賜金)이라는 명목으로 원로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71세였는데 의리를 들어 절대 받을 수 없음을 주장하자, 온갖 회유와 위협과 협박을 하고,  두 차례나 지평 감옥에 그를 구금시켰다.  동요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다음과 같은 잠(箴)을 지어 자신의 의지를 굳혔다.

“일본이 주는 금을 결코 받을 수가 없는 것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의리가 우주에 영원하기 때문이다.  한개도 취하지 않으니 마음이 금석(金石)처럼 단단하네, 이렇게 하는것은 병이 호덕(秉彝好德)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

다시유인석에게 보낸 편지 한 편을 보기로 한다.

“지난 겨울 이별 한 뒤로 아직 서로 소식도 모른 채 벌써 봄이 되었습니다. 매우 그리워하고 있었는데 사우(士友)들이 오는 편에 새해들어 도체가 다소 불편하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염려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항와(恒窩) 도담환(痰患)을 오래 앓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나도 신음하면서 한 해를 보냈으니 이것이 우리 모두 노쇠한 징후 일 것입니다.  어찌하면좋겠습니까.
면암(勉庵)이 결국 왜도(倭島)에서 세상을 떠나 이제 막 그 영구가 돌아 왔다고 합니다.  아, 슬픈 일입니다.  면암은 참으로 시작을 잘하고 마침도 잘하여 세상 일을 마무리 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들의 처지에서는 우리 도가 더욱 고단해졌다는 탄식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 한통의 편지에서 묻어나는 여러 가지 시대 상황은 가슴이 저려오는것을 느끼게 한다.  이제 노쇠함으로 인한 병고와 면암 최익현의 별세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 지는 글이 아닐 수 없다.
흔히들 성문삼현(省門三賢)이라 일컫곤하는데 이는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문하(門下)에 출중한 세 사람의 제자를 지칭하는 말로,  의리(義理)에는 유인석(柳麟錫)을,  문장(文章)에는 유중악(柳重岳)을,  덕행(德行)에는 이근원(李根元)을 손꼽는 말이다.  그리고 그의 저서로는 《금계집(金溪集)》이 있고, 편서(編書)에는 《송서략선(宋書略選)》이 있다.  특히 그의 저술 가운데 <행자설(幸字說)>, <자경문(自警文)>, <지경설(持敬說)>, <명덕설(明德說)>, <신언설(愼言說)>, <삼명설(三命說)>, <화이의복변(華夷衣服辨)>, <출처설(出處說)> 등의 작품은 그의 사상적 측면을 엿 볼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그리고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526 용문산 입구에 조성된 국민 관광지 공원에 많은 시비(詩碑)들이 세워져있는데 그곳에는 이항로의 <차용문(次龍門)>이라는 오언율시(五言律詩) 1수와  함께 이근원의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시(詩)가 비석에 새겨 세워져 있다.  이근원의 시 작품 제목은<윤필암(潤筆菴)>으로 되어 있다.

큰소리로 노래 부르며 층층산을 올랐더니
高歌更上一層山
나무숲 사이로 솟은 바위들 까마득 하여라
渺渺千巖萬樹間
날은 저물고 하늘은 맑아 인적 드무니
日晏天晴人氣定
새 울고 꽃이지는 봄 정취만 한가롭다
鳥啼花落春心閑

늦은 봄의 정취를 한껏 느끼게하는 작품이다.  지은이의 드높은 기상도 엿볼 수 있을 듯하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근접한 봄날의 평온함을 읊고는 있으나 한편으로는 이 작품을 통하여 현실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 외물과의 괴리감을 애써 미화하여 묘사한 것으로 여겨 지기도 한다.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높은 산을 올라가는 작자의 심정은 내면의 불만이나 시대의 아픔을 어쩌지 못하여 역으로 표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다.  굽히지 않은 기상을 자랑하며 숲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기도 한다. 마침 날은 저물어 가고 인적이 드문 시각이 되자,  산새들은 자유롭게 노래하고 꽃도 제냥 피고 진다.
그래서봄을 맞이한 정취는 한가롭게 비쳐진다.  하지만 웬지 작자의 마음은 편하지만은 않은 듯한 여운을 남기고 있는 그런 작품이다.  지은이 이근원은 윤필암을 가면서 이 작품을 통해 정녕 말하고자 한것은 무엇이었을까?

<참고문헌>
《국역금계집(國譯錦溪集)》,친환경농업박물관,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