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주(任靖周)


임정주(任靖周)                                                             PDF Download

 

정주(任靖周, 1727년∼1796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조선시대의 유명학 유학자인 임명주(任命周, 1705∼1757), 임성주(任聖周, 1711∼1788),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의 동생이다.

1762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다년간에 걸쳐서 영조 임금을 경연에서 모시고, 동몽교관에 임명되어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을 거쳐, 서연관으로 당시 세손(世孫)이었던 정조를 보필하며 학문을 강론하고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에 밀려나 송화현감, 온릉령(溫陵令), 청산현감(淸山縣監) 등 미관말직(微官末職)으로 전전했다.

학문적으로는 위 형들과 성리학자인 누나의 영향을 받아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배격하고 성즉기(性卽氣)라고 주장하며, 기일원(氣一元)의 주기설(主氣說)을 확립하였다.

 

1727(1세, 영조 3년)
함흥판관을 지낸 노은(老隱) 임적(任適)의 5남 2녀 중 아들로 태어났다. 성리학자 백신(伯新) 임명주(任命周, 1705∼1757),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1788), 그리고 여성 유학자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의 동생이다. 증이조판서 윤부(尹扶)의 외손자이며, 본관은 풍천(豐川, 지금의 황해도 송화), 자는 치공(穉恭), 호는 운호(雲湖)이다. 어머니 윤씨는 파평윤씨 호조정랑 윤부(尹扶)의 딸이다.

 

1728년(2세, 영조 4년)
부친이 역병으로 사망하였다. 부친은 관직을 물러난 뒤에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오직 학문에 힘썼다. 유교 경전과 기타 다양한 서적을 섭렵하며, 재리(財利)를 멀리하여 사망할 때는 장례비용이 없어 주변에 돈을 빌려야할 정도로 궁핍하였다. 부친의 유고집으로 ⌈노은집(老隱集)⌋이 있다.

 

1729년(3세, 영조 5년)
모친을 따라 청주(淸州) 근처 옥화(玉華)로 이사하였다. 친형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에게 누나인 임윤지당과 함께 글을 배웠다. 큰형 임명주는 사간원 정언을 지냈고, 둘째 형 녹문 임성주(任聖周)는 군자감정(軍資監正), 성천부사를 지낸 유학자이다. 누나 임윤지당은 여성 성리학자다.

 

1737년(11세, 영조 13년)
가족이 여주(驪州)로 이사하였다. 이때의 일을 임정주(任靖周)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이 열한 살 때 청주 옥화에서 여주로 이사가 살게 되었다. 여주는 번화한 곳이어서 친구들이 밀고 당겨 나도 모르게 방자하게 되었다. 누님이 조용히 타이르시기를 ‘왜 방심한 마음을 거두지 아니하고 남들을 따라 다니면서 두레박처럼 오르락내리락 놀기만 하느냐’ 하셨다. 내가 이 말씀을 듣고 깊이 뉘우치고 곧 마음을 바로 잡았다. 누님께서는 순순히 가르치시고 타이르는 성의가 간절하셔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큰 죄를 면하게 된 것은 실상 우리 누님께서 그때 깨우쳐 주신 덕분이다.’하였다.”

1740년(14세, 영조 16년)
누님 임윤지당이 원주 선비, 평산신씨(平山申氏) 신광유(申光裕, 1722∼1747)와 결혼했다. 매형 신광유는 7년 뒤 25세로 요절하고 누님은 자식도 없이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되었다.

 

1757년(30세, 영조 33년)
11월, 큰형 임명주(任命周)가 사망했다.

 

1758년(31세, 영조 34년)
12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762년(35세, 영조 38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1767년(40세, 영조 43년)
세손의 교육에 관여하였다. 조정에서 연락이 와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를 받아 그 장구(章句)를 정하고 그 의심스러운 뜻을 해석하고 그 언해와 구두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수년이 걸린 이 일에 이관(李灌), 한용화(韓用和), 박사형(朴師亨), 이겸진(李謙鎭), 심정진(沈定鎭), 안정복(安鼎福)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참여하였다.

 

1772년(45세, 영조 48년)
동몽교관에 임명되었다.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을 거쳐, 서연관으로 당시 세손(世孫)이었던 정조를 보필하며 학문을 강론하고 신임을 얻었다. 이 때 강연했던 내용의 일부가 그의 유저 ⌈운호집⌋에 들어 있다. 제3∼4권에 들어 있는 잡저 중 「숙예록(宿預錄)」이 그것인데 고금의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서적에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각종 이야기를 선정하여 만든 것으로 방대한 내용이다. 여기에 실린 기록은 실지로 행한 강의 중 일부라고 한다.

 

1773년(46세, 영조 49년)
존현각에 들어가 임금을 모시고 ⌈자치통감강목⌋을 읽었다. 이 때 같이 참여한 자는 문학 서유신, 사서 오정원 등이었다. 임정주는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의 자격이었다. 이 후 경연에서, ⌈속 자치통감강목⌋, ⌈예기⌋, ⌈성학집요⌋, ⌈주자서절요⌋ 등을 1775년 음력 4월까지 계속 읽었다.

 

1776년(49세, 정조 1년)
자신이 가르쳤던 정조가 즉위하였다. 송화현감(松禾縣監)에 임명되었다. 송화는 현재의 황해도 송화군이다. 기대했던 요직은 아니었다. 이 해에 새로 등극한 정조 임금으로부터 새끼 말 1필을 상으로 받았다.
이후 임정주는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에 밀려나 계속해서 요직에는 등용되지 못하고,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사옹원주부, 온릉령(溫陵令), 청산현감(淸山縣監) 등 미관말직(微官末職)으로만 전전했다.

 

1777(50세, 정조 2년)
여름에 조정에서 이루어졌던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 이러한 내용이 ⌈정조실록⌋ 6월15일자 기록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황해 감사 이성원(李性源)이 임금에 올린 보고서에, 수안 군수(遂安郡守) 정윤필(鄭潤弼)에 대해서는 뜻은 부지런히 힘쓰지만 정사는 혹 부드럽고 선하다고 하고, 송화 현감(松禾縣監) 임정주(任靖周)에 대해서는 어찌 부지런하지 않겠는가마는 점점 세상일에 많이 어두워졌다고 하여 모두 중을 주었으며,

– 임정주는 하(下)를 주었다. –

청단 찰방(靑丹察訪) 권계술(權啓述)에 대해서는 사리에 어두워서 일을 제대로 행하지 못한다고 하여 하를 주었다.”

황해감사의 평가가 임정주는 중(中)이었는데, 추가된 평가에서 더 낮은 하(下)를 받았다.

 

1785년(58세, 정조 9년)
누님 임윤지당이 자신의 문집 초고를 보내왔다. 누님은 문집간행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문장을 정리하여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 안에는 「송씨부(宋氏婦)」부터 「안자소락론(顔子所樂論)」까지 초년 저작 8편과 「자로론(子路論)」 이하 중년 저작과 만년 저작 32편 등 모두 40편이 들어 있다. 이를 조카 신재준(申在峻)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멸실을 우려하여 자신에게도 필사본을 보내달라고 하여 필사본 1부를 받았다.

 

1788년(61세, 정조 12년)
조정에서 음해가 있었으나 정조의 은혜로 벗어나게 되었다. 일성록 8월 13일자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음관이 6인인데 그중에서 임정주(任靖周)와 이헌호(李獻祜)도 무슨 죄가 있어 이 명단에 써서 들였는가. 이들도 지우도록 하라. 그 외에 써서 들인 4인도 무슨 죄가 되는지를 모르겠으며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모르겠다.”

 

1793년(66세, 정조 17년)
이즈음 청산현감을 역임했다. 누님 임윤지당이 사망했다. 향년 72세였다. 이전에 받은 누님의 원고를 정리하여 3년 뒤인 1796년에 활자로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 2권 1책을 간행했다.
이 해에 충청감사 이형원(李亨元)이 임정주의 치적을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청산현감(靑山縣監) 임정주(任靖周)는 문아(文雅)함을 스스로 지키고 다스리는 법도가 정연하였으며, 5년간 백성을 다스려 관리와 백성이 서로 익숙히 잘 알았습니다. 스스로 진휼을 담당하여 밤낮으로 노심초사하며 혹 한 가지 일이라도 다하지 못할까, 한 명이라도 살 곳을 잃게 될까 염려하였습니다. 기민을 뽑을 때는 신중히 하여 정확한지 과다한지를 살펴 합당하게 하는 데 마음을 쏟았고, 비방이나 칭찬에도 상관없이 성심껏 일을 해 나가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고상한 데 뜻을 두었다는 이유로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에 소홀히 하지 않아 비록 힘이 쇠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반드시 애써서 폐단을 살폈고, 정치는 옛 제도를 숭상하였으나 진휼(賑恤, 흉년에 가난하고 궁핍한 백성을 불쌍히 여겨 도와줌)도 실제 효과를 보도록 힘써 온 경내가 안도하였고 칭송하는 소리가 한결같았으며, 자비한 곡물도 95섬이 되었습니다.”

위와 같은 보고서와 함께 다음 자료도 함께 제시되었다.

 

“청산현(靑山縣) – 1월부터 4월까지 진휼(賑恤)을 12차 시행하였는데, 기민(饑民, 굶주린 백성)이 도합 1만 1722구이다. 분급한 조가 973섬 6말 남짓인데, 그중 105섬 6말 남짓은 진휼곡을 떼어 준 것이고, 443섬은 첩가곡이고, 95섬은 현감 임정주(任靖周)가 자비한 것이고, 280섬은 감영에서 자비한 것이고, 50섬은 백성이 원납한 것이다.

죽을 쑤어 분급할 때 쓴 미가 18섬 14말 남짓이고, 장과 메주를 만들 때 쓴 태가 18섬 4말 남짓인데, 그중 12섬 4말 남짓은 진휼곡을 떼어 준 것이고, 6섬은 현감 임정주가 자비한 것이다. 침장염이 18섬 4말 남짓이고, 염이 3섬 7말 남짓인데, 그중 7말 남짓은 떼어 준 진휼곡으로 산 것이고, 3섬은 현감 임정주가 자비한 것이다. 곽이 95단 남짓인데, 그중 85속(束) 남짓은 떼어 준 진휼곡으로 산 것이고, 10속은 현감 임정주가 자비한 것이다.

○ 세전에 구급을 시행하였는데, 기민이 496구이다. 분급한 조가 29섬 5말이고, 죽을 쑤어 분급할 때 쓴 미가 14말 남짓이다. 장이 10말 남짓이고, 곽이 2단 남짓인데, 현감 임정주가 자비한 것이다.

○ 별순을 시행하였는데, 기민이 1241구이다. 분급한 조가 85섬 8말 남짓이고, 죽을 쑤어 분급할 때 쓴 미가 1섬 남짓이고, 장이 2섬 4말 남짓이고 곽이 9단 남짓이다.”

이러한 보고를 근거로 조정에서는 임정주는 통정대부로 승진시켰다.

 

1794년(67세, 정조 18년)
청산현감으로서의 선정이 중앙에 보고되어 왕의 특명으로 승진하여 중추(中樞)의 직함을 받았다.

 

1796(69세, 정조 20년)
사망했다. 저서로 시문집(詩文集) 운호집이 있다. 아들 임걸(任杰)이 1817년(순祖 17년)에 간행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임정주는 평생 동안 위기(爲己, 자신을 위한 수양)의 학문에 전심하여 거경궁리(居敬窮理, 경에 처하여 진리를 추구함)하고, 존심양성(存心養性, 마음을 잘 보존하고 본성을 양성함)에 힘썼다. 아울러 형 임성주의 학문을 이어받아 이(理)와 기(氣)의 이원론, 즉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배격하고 성즉기(性卽氣)라고 주장, 기일원의 주기설(主氣說)을 확립하였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도 형 임성주의 학설을 따랐는데, 심체(心體)는 성인(聖人)과 범부(凡夫)가 모두 같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양쪽 당사자를 비판하였다. 또 성(性)뿐만 아니라, 심(心)·기(氣)에도 본연(本然)과 말류(末流)의 구별이 있다고 주장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해제」. 최연미, 「임윤지당의 생애와 (윤지당유고)」, ⌈서지학연구⌋17, 1999.6. ⌈홍재전서(弘齋全書)⌋제3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