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경(李基敬)


이기경(李基敬)                                                              PDF Download

1713년(숙종 39)∼1787년(정조 11)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이기경의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백심(伯心), 호는 목산(木山)이다. 아버지는 참봉 이익열(李翊烈)이고 어머니는 오대성(吳大成)의 딸이다. 1713년 1월 11일 나주 도림촌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50세 무렵 벼슬에 물러나 전주 오목대 아래에서 살며 후학을 양성하였기 때문에 호를 ‘목산’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자식의 성공을 위해 매일 50편의 시를 짓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1726년 이유(李瑜, 1690∼1752)가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호남 선비들을 상대로 백일장을 베풀었을 때, 이기경은 14세의 나이로 백일장에 나아가 모든 부문에서 장원하여 명성을 크게 떨쳤다.

그의 집안은 전주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호남의 명문가였다. 이기경은 20대 초까지 향리에서 학문을 탐구하다가, 한양으로 상경하여 도암 이재(李縡, 1680∼1746)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익혔다. 과거에 급제한 이후에는 크고 작은 벼슬을 역임하면서 그 소임을 다하고자 일기를 쓰며 자신을 성찰하였다. 특히 언관(言官)으로 있을 때에는 진솔하게 올린 상소가 너무 과격하다고 하여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기경은 50세에 벼슬에서 물러나 전주 오목대(梧木臺) 아래에 거주하며 성리학을 탐구하는가 하면, 인근의 학자들과 담론을 나누면서 강학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동문인 순창의 양응수(楊應秀, 1700∼1767)와 고창의 황윤석(黃胤錫, 1729∼1791) 등 여러 학자들과의 학문적 교류는 관료생활로 탐구하지 못한 성리사상을 면밀하게 고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호남의 학문은 김인후(金麟厚)와 기대승(奇大升)에게서 연유하여 박광일(朴光日)과 이기경에 이르렀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이기경의 학문은 호남을 대표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조가 벼슬에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향리에 물러나기를 쉽게 여긴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진퇴관이 분명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에는 소신이 남달라 영조가 지극히 총애하였다.

1759년(영조 35) 2월에 영조는 이기경을 호조참의에 제수하면서

“네가 제수하지 아니하면 누가 능히 하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영조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에 대한 기사가 총 69차례 나온다. 이를 보면 이기경은 그저 전주지역만의 인물이 아니라 중앙무대에서 크게 활약한 관료이며 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1779년(정조 3) 2월에는 영조의 탕평책을 가장 반대하였던 사람 중의 하나인 홍계희(洪啓禧)와의 친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함경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이정유서(二程遺書)」를 분류하는 등 성리학을 탐구하였으며, 「해상단방(海上單方)」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해상단방」은 집안에 처할 때 자세, 교제할 때 마음가짐, 그리고 벼슬에 나아가 해야 할 역할 등을 옛 성현들의 글을 인용하여 저술한 것이다. 1785년 73세 때에는 스승 이재의 「도암예설(陶庵禮說)」을 교정하였으며, 1787년 12월에 유배지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아들 이덕감이 상소하여 부친의 원통함을 호소하니 정조는 1788년(정조 12) 9월에 이기경의 죄를 씻어주었다. 이후 인봉소원(麟峯書院)에 배향되었고 유집으로 「목산고(木山藁)」가 전한다.

그는 관리자로 벼슬에 있을 때나 죄인으로 유배지에 있을 때 줄곧 일기를 썼다. 이러한 일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관리자로 있을 때에는 책임의식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죄인의 신분으로 있을 때에는 자신에 대한 성찰의식을 갖는 것이었다. 생원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면서 쓴 「취정일기(就正日記)」를 시작으로, 1746년(영조 22) 8월에 평안도의 태천현감이 되어 쓴 「태주일록(泰州日錄)」, 1755년(영조 31) 5월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어 쓴 「서연일기(書筵日記)」, 1765년 3월에 충청도 동쪽으로 유람하면서 쓴 「동유일기(東遊日記)」 등이 있다. 이러한 일기는 이기경의 개인적 생활 및 소회 그리고 그 당시 사회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서 1755년(영조 31) 7월에 동지사서장관에 임명되었을 때 쓴 「음빙행정역(飮氷行程曆)」을 소개하고자 한다. 「음빙행정역」은 1755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의 청나라 북경을 연행한 일기이다. ‘음빙’이란 ‘얼음을 마신다’는 뜻으로 추운 지방에 간다는 의미이다. 즉 동지사서장관으로 서울을 출발하여 북경(연경)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북경 체류 기간 중의 활동, 다시 북경에서 귀국할 때의 여정에서 보고 들은 풍물과 체험 내용을 일기로 쓴 기행문이다.

일기는 청나라로 출발하기 일주일 전인 11월 3일부터 시작된다. 3일에는 여행 경비에 충당할 예산을 신청하는 문제로 국왕을 면대한다. 4일에는 의정부에서 외교문서의 오류를 확인하는 등 연행에 필요한 각종 사항을 재차 점검한다. 이후 일행은 11월 9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개성(開城)에 도착, 이어서 평산(平山)․황주(黃州)․평양․의주(義州)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심양(瀋陽)에 도착한다. 그리고 사신 일행은 12월 29일에 청나라의 예부(禮部)를 방문하여 외교문서를 전달하고 상견례를 나눈다. 일행은 북경의 여러 지역을 관광하거나 청조에서 베푸는 다양한 의례행사에 참석한다. 이후 일행은 1756년(영조 32) 2월 16일에 북경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다. 4월 4일에 서울에 도착하고, 4월 5일에 국왕을 알현하여 업무를 보고한다.

이기경의 「음빙행정역」에는 당시 청 왕조의 정치․군사적 동향이나 북경을 중심으로 한 중국 사회의 여러 모습들이 잘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연행록인 「음빙행정역」에는 도처에 명나라에 대한 추모와 청 왕조에 대한 반감이 나타나 있다. 이는 같은 노론 낙론계 북학파들의 태도와 크게 다른 점이다.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의 북학파들이 청나라의 발달한 산업과 문화를 열심히 배워 도입하고자 한데 비하여, 이기경은 청나라에 대해 태생적인 거부감을 보였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청나라의 사신으로 가서 황제에게 절했던 일을 훗날에 회고하면서

“지금까지도 오랑캐에게 절했던 일을 마음속으로 수치스럽게 여긴다”

고 토로하였다.

이기영이 연행을 다녀온 1755년 당시는 청나라가 강희(康熙)․옹정(擁正)의 치세를 지나면서 정치․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와 문화가 날로 번창하던 전성시대였다. 이러한 청 왕조의 번성기에 북경 일대를 여행한 이기경은 그 번화한 도시와 풍부한 물산 그리고 강성한 군대에 놀라기는 하였으나, 경멸과 혐오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멸망한지 100년이 지난 명 왕조의 그림자를 찾는 일에 연연해하였다.
이기경은 청의 쇠망과 한족 왕조의 부흥 징조를 비과학적인 자연현상에서 찾기도 하였다. 1755년 12월 26일 옥전(玉田) 근방의 고수촌(枯樹村)을 지나면서 난세(亂世)에는 잎이 말라 없어지고 치세(治世)에는 다시 잎이 싹튼다는 영험한 ‘고수’의 가지를 꺾어보았다. 그 마른 가지에 물기와 생가가 있는 것을 보고 나서 그는

“이 고수에 곧 잎이 싹틀 것이며, 청조가 망하고 정통 한족이 일어날 것이다”

고 예측하였다.

북경 주변에 많이 건립되었던 황제의 호화로운 별궁이나 행궁(行宮) 및 불우(佛宇)를 보면서 이것이 국가 재정을 파탄시키고 민원을 야기하는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당시 청조는 재정이 고갈되어 상인들에게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이 때문에 파산하여 실업자가 되는 일이 많다는 등의 정보들에 매우 주목한다. 이기경은 건릉황제의 일탈적 행태와 각 지역의 반란, 재정 고갈, 민심 이반 등 각종 모순을 청 왕조가 몰락하는 징조로 파악하였다. 어떤 측면에서 그는 청 왕조의 멸망을 바라면서 그 징조를 찾아내는데 몰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그의 중화주의와 화이관(華夷觀) 및 반청(反淸) 감정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후기 존주론(尊周論)의 창시자였던 송시열의 학맥을 이은 이재의 촉망받던 제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 다음 세대인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 노론 북학파 학자들에 의해 비로소 극복되고 있지만,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정신세계와 의식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 「순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목산 이기경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일고」(이형성, 「퇴계학논총」18, 퇴계학부산연구원, 2011), 「목산 이기경의 연행록< 飮氷行程曆>」(이영춘, 「한중인문학연구」44, 한중인문학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