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수(李趾秀, 1779-1842)


이지수(李趾秀, 1779-1842) PDF Download

 

이지수는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계린(季麟), 호는 중산재(重山齋)이다. 형신(衡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보(熙輔)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명원(命源)이다.

19세에 서울로 올라가 족부(族父) 병원(秉源)에게 수학하였다. 병원은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6대손으로 아들이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다. 1809년(순조 9) 사마시에 합격하고 1813년(순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거쳐 병조좌랑·시강원사서가 되고, 1825년 옥구현감으로 나갔다. 1831년 동부승지가 되고 1840년(헌종 6) 회양부사 등을 지내고 1842년 다시 동부승지가 되었다.

옥구현감으로 있을 때는 민폐를 없애고 백성을 구휼하는 한편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다. 동부승지가 되어서는 여러 차례 소대(召對 : 왕의 부름에 의한 대좌)에 응하여 국가기본정책을 건의하였다. 만년에는 향리에 돌아와 중산재를 짓고 후진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중산재집(重山齋集)』 8권이 있다.

 

중산재집⌋은 8권 4책으로 활자본이다. 1858년(철종 9) 손자가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송달수(宋達洙)의 서문이 있다.

시에는 영회(詠懷), 또는 자연을 주제로 한 시가 많다. 「해인사유회고운(海印寺有懷孤雲)」은 해인사를 찾아가 최치원(崔致遠)의 유적을 돌아보고 옛일을 회고하는 시다. 「해금강(海金剛)」은 해금강의 경치를 노래한 것으로 서경의 표현 기교가 수준 높다.

소차는 「사승선환향겸진면학소(辭承宣還鄕兼陳勉學疏)」 등 사직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며, 연설은 『맹자』 제3권 등을 경연에서 강의한 내용이다.

서(書)의 「상재상(上宰相)」과 「여이판서광정(與李判書光正)」에는 회양의 삼정 문란(三政紊亂), 특히 환곡의 폐단과 읍민의 비참한 실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밖의 글들에는 정도(正道)와 문법(文法) 등에 관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

잡저의 「황정십조(荒政十條)」는 당시의 시정 개혁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진심(盡心)·택인(擇人)·서력(紓力)·예비(豫備)·정초(精抄)·진급(賑給)·즙간(戢奸)·금도(禁盜)·상벌(賞罰)·고적(古蹟) 등을 열거하고 있다.

또한, 「가녀계사(家女戒辭)」는 여자가 출가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행동 규범을 상세히 기술한 것이고, 「책제(策題)」는 군자와 소인의 구별 방법, 인재 등용, 목민의 중요성 등을 기술한 내용이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