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원(黃景源: 1709~1787)


황경원(黃景源: 1709~1787)                                PDF Download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유로(江漢遺老)이다. 휘(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정랑 처신(處信)이고,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기(璣)이며, 어머니는 권취(權冣)의 딸이다. 승원(昇源)의 형이며 이재(李縡)의 문인인 그는 이천보(李天輔), 오원(吳瑗), 남유용(南有容)과 함께 영조 시대의 문장사가(文章四家)로 꼽힌다. 그는 서인계(西人系)의 노론(老論)을 대표하여 강경한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을 주장하였고, 영조와 정조 연간의 사상사, 정치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727년(영조3)에 19세로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 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내다가 1740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들고, 이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병조 좌랑(兵曹佐郎)을 거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있을 때에는 명나라 의종(毅宗)의 추사(追祀)를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이후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 겸 양관제학(兩館提學) 등의 청화직(淸華職)을 거쳐, 1761년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고서(姑壻) 이정(李涏)의 상언사건(上言事件)에 연좌되어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합천(陜川)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고향으로 방환(放還)되고, 그 이듬해인 1763년에는 풍천부사(豐川府使)로 복관(復官)되었으며, 1766년에는 문형(文衡)인 대제학(大提學) 직임을 한 달간 역임하였다. 그 해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세손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초대되어 세손 시절의 정조(正祖)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후 영조(英祖)가 승하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호조참판, 홍문관제학, 이조참판 겸 대제학과 형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활약하였다. 1775년에는 교서관 제조(校書館提調)로서 《팔순유곤록(八旬裕昆錄)》을 간행하여 올렸으며, 이듬해인 1776년에 영조가 승하하자, 빈전도감(殯殿都監)의 제조(提調)가 되어 <영조대왕 애책문(英祖大王哀冊文)>을 지었다.

1776년에 정조가 즉위한 뒤에도 이어서 예문관 제학, 의정부 좌참찬, 비변사 제조 등의 직임를 염익하였으며, 1777년에는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로 재임하던 1787년 2월에 향년 79세의 나이로 졸서(卒逝)하였다.

그는 서예(書藝)에도 뛰어났으며, 예학(禮學)에 정통하고 고문(古文)에도 밝아, 오원(吳瑗), 이천보(李天輔), 남유용(南有容) 등이 그를 따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춘추대의(春秋大義)로 자임하여 1418년(태종18)부터 1645년(인조23)까지의 《남명서(南明書)》를 편찬하였고, 또 명나라 의종(毅宗) 이래로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킨 조선 사람들로 그들의 전기(傳記)인 《명조배신전(明朝陪臣傳)》을 저술하였는데, 이 글은 그의 문집인 《강한집(江漢集)》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저서인 《남명서》는 《실록(實錄)》이 수록하고 있는 그의 졸기(卒記)와 이민보(李敏輔)가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을 통해 당대에 많은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특히 《명조배신전》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명조배신전》은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병자호란 당시에 명과의 의리를 지켰던 인물로부터 명을 위해 복수해야한 한다고 한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완(李浣) 등 숙종 연간 인물까지 무려 65명에 달하는 인물들의 전기(傳記)를 모은 책이다. 내용은 주로 서사체(敍事體)의 문장을 구사한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졸기(卒記)에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의 평생 문장이 이 책에 다 들어 있다.”

라는 세간의 평가를 인용해 놓았다.

따라서 이 저술은 황경원의 문장력과 대명의리론이 집약된 결정체로 보아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특히 저촌(樗村) 이정섭(李廷燮)이

“삼백 년 이래로 없었던 글”

이라고 평가한 말과 이규상(李奎象)이

“팔문장의 한 사람”

으로 지목한 것과 김윤식(金允植)이

“영조 대의 고문가(古文家)로 황경원이 으뜸”

이라고 평가한 말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외에도 각종 산문 선집으로 홍길주(洪吉周)의 《대동문준(大東文雋)》과 송백옥(宋伯玉)의 《동문집성(東文集成)》과 윤광심(尹光心)의 《병세집(幷世集)》에서도 여전히 문장가로서의 황경원의 이름을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교서관(校書館)에서 그의 문집인 《강한집(江漢集)》을 완간하자, 정조 임금이 직접 그 문집에 대한 논평을 하였는데, 그 글이 1790년에 윤행임(尹行恁)이 기록한 《일득록(日得錄)》의 문학조(文學條)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새로 간행한 《황강한집(黃江漢集)》은 뛰어난 문장이라고 할 만하다. 일을 서술한 곳은 시원스러우면서도 기이하고, 논지(論旨)를 세운 곳에서는 뜻이 높으면서도 바르며, 또 간간이 경륜(經綸)이 담겨 있다. <자제위장(子弟衛狀)>과 같은 글은 곧장 소동파(蘇東坡)의 책문(策文)을 뒤좇을 만하니, 이 사람 이후로는 이만한 사람을 얻기 힘들 것이다.”

정조 임금이 호학(好學)하는 군주(君主)인 줄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신하의 문집에 대하여 이러한 평언을 하는 것도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신하로서 임금으로부터 직접 이러한 평가와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군신간에 상호 그만한 신뢰가 쌓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또한 황경원에게 그만한 내공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동파의 문장을 바짝 뒤좇을 만한 문장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결코 단순한 평가로만 간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실제로 1790년에 교서관 활자본을 간행한 그의 《강한집》은 32권 15책으로 방대한 분량을 자랑할 만하며, 이 문집에는 여러 분야의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황경원은 문장뿐만이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도 박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 보면, 검토관 이성중(李成中)이 옛날 홍문관에 소장된 책을 열람하다가, 북경본[燕本]인 《역대통감찬요(歷代通鑑纂要)》를 찾아 올렸는데,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내보이며,

“책의 상단에 찍힌 광운지보(廣運之寶)는 어느 시대의 어보(御寶)인가?”

라고 묻자, 당시에 기사관(記事官)이었던 황경원(黃景源)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명나라의 어보입니다. 신이 일찍이 명나라 조정의 고 병부상서(兵部尙書) 전응양(田應暘)의 제서 모본(制書摹本)을 보았는데, 역시 이 어보가 찍혀 있었습니다.”

이처럼 황경원은 폭넓은 식견으로 당시의 군신간의 의리를 돈독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문장력은 후대에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참고문헌>
– 《강한집(江漢集)》 해제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