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치량(閔致亮, 1844-1932)


 

민치량(閔致亮, 1844-1932)                                  PDF Download

 

치량(閔致亮, 1844-1932)은 경남 산청 사람으로 종9품의 문관이었던 민재규(閔在圭)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정진에게 배우고, 27세 때 과거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관직생활 2년 만에 사퇴를 하고 낙향하였다. 이후 성리학 공부를 하면서 친구들과 교류를 하고, 강원도와 서해안 지방을 유람하여 여행기를 써서 남겼다.

1844(1세, 헌종 10)에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山淸)에서 민재규(閔在圭)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민재규는 종9품 문관인 장사랑(將仕郞)을 지냈다. 어머니는 남원 양씨(南原梁氏) 양천민(梁天民)의 딸이다. 조부(祖父)는 민이주(閔以珠), 증조부(曾祖父)는 민일(閔鎰)이다. 형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의주부관찰사(義州府觀察使) 등을 지낸 민치완(閔致完, 1838-1911)이다. 본관(本貫)은 여흥(驪興), 자는 주현(周賢), 호(號) 계초(稽樵)이다.

1850(7세, 철종 1)에 큰아버지 회정공(晦亭公)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어려서부터 품성이 온화하고 어질었으며 공손하였다. 후에 성리학자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을 찾아가 그동안 품고 있는 의문점을 질문하였다. 의리(義理)와 왕패(王覇)에 대한 기정진의 설명을 듣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기정진은 순창(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으로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아 향리에서 제자들을 키우고 있었다. 나중에 서경덕, 이황, 이이, 이진상, 임성주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이름을 떨친 기정진은 당시 52세였다. 기정진의 노사집(蘆沙集)에는 민치량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민치량의 문집에는 스승에게 보낸 3건의 서신(「상노사선생서(上蘆沙先生書)」 등)이 실려 있다. 그 서신에서 민치량은 스승에게 처세와 예설에 관한 질문을 하기도 하였다.

1870(27세, 고종 7), 식년 전시(殿試)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였다. ⌈고종실록⌋ 7년 4월 28일 기록에 고종이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식년 문무과 전시(式年文武科殿試)를 행하였다. 문과에서 민치량(閔致亮) 등 33인을 뽑고, 무과에서 오순영(吳順泳) 등 28인을 뽑았다.’라고 하였다. 장원 급제하였기 때문에 대표로 그의 이름이 실록에 오른 것이다.

민치량은 이해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임명되었다. 전적의 업무는 각종 문헌과 도서의 수장(收藏)과 출납‧관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사직을 신청하였다. 당시 조정의 업무를 총괄하고 관리의 인사와 봉록을 담당하던 이조(吏曹)에서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승정원일기․고종7년⌋, 6월 20일자) “성균관 전적 민치량(閔致亮), 선공감 가감역관 정현행(鄭顯行), 심노면(沈魯冕), 신항(申杭)이 모두 신병을 이유로 사직을 신청하였으니 모두 새로운 관료로 교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은 이러한 보고에 허락을 하였다. 하지만 그해 8월 2일에 민치량은 다시 감찰에 임명되어 관직을 떠날 수 없었다.

1872(29세, 고종 9)에 장령(掌令)에 임명되고, 이어서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으로 임명되었다. 장령으로 있을 때에 헌납(獻納) 김진휴(金震休)와 함께 연명으로,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선동한 해주사람 김응봉(金應鳳)과 김준문(金俊文)에 대해서 유배 이상의 극형을 처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유배형으로 사건을 마무리 하려고 하였다. 민치량 등은 이러한 결정에 반발한 것이다. 임금은 “끝까지 잘 살피고서 결정을 내린 만큼 따지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러한 느슨한 결정에 조정의 관료들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후에도 김응봉 등을 국역죄로 엄히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당시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등이 일어나 시국이 어수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대신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를 분개하여 민치량은 당시 상황을 비상시국으로 간주하고 엄정히 대처해야 한다는 소(疏)를 올린 뒤에 낙향하였다. 소의 내용은 그의 문집인 ⌈계초집⌋에 실려 있다.

낙향 후에 동문이자 친구 사이인 조성가(趙性家)와 정재규(鄭載圭) 등과 교류하면서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당시 이들과 왕래한 편지에는 유교 경전(經典)이나 이기설(理氣說)에 관한 논의가 담겨있다. 민치량은 이기설에서 기정진의 설에 따라, 이선기후(理先氣後, 리가 기보다 앞선다)가 원칙이지만, 유행(流行)함에 따라서는 ‘기형이구(氣形理具)’ 즉 기는 형체로 나타나고 리가 거기에 구비된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기정진은 리일원론적(理一元論的) 세계관에 입각하여 리의 주재성(主宰性)을 강조하였다.

1876(33세, 고종 13). 전 해(1875) 9월 20일경에 강화도에 일본 군함 운양호가 측량을 구실로 불법으로 들어와 조선 수비대와 전투가 있었다. 일본은 이를 구실로 2월 3일(음력) 조선과 불평등 수호조약 체결하였다. 민치량은 2월에 한양을 출발하여 포천, 철원, 김성(金城), 회양(淮陽)을 거쳐 단발령(斷髮嶺)을 넘어 금강산을 구경하였다. 다시 고성(高城), 통천(通川), 강릉을 거쳐 한양으로 돌아왔다. 모두 47일이 소요된 이 여행에서 그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관동기행략(關東紀行略)」(⌈계초집⌋)에 소상이 기록하고 있다.

1888(45세, 고종 25) 4월 다시 한양을 출발해 운봉(雲峰), 대방성(帶方城), 적성강(赤城江), 담양 등지를 거쳐 부안 앞 바다에 있는 위도(蝟島)로 갔다. 계초집 잡저에 실려 있는 「위해기행(蝟海紀行)」은 이러한 여정에서 그가 겪은 여러 가지 일과 아름다운 풍물을 묘사한 기록이다.

1932(89세, 일제시대)에 사망하였다. 문집(文集) 12권 5책이 전한다. 「계초집」은 1934년에 민달호가 편집하여 간행하였는데 12권 5책으로 되어 있다. 현재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에 등에 보존되어 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승정원일기」,「문과방목」

권오호, 「계초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