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과 우계, 친구 이상의 친구


율곡과 우계, 친구 이상의 친구

 

율곡이 평생을 함께한 가장 절친한 벗은 우계 성혼이었다. 율곡이 1536년생이고 성혼이 1535년생이라 성혼이 한 살 더 많았지만 이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친구로 사귀었다. 우계 성혼은 청송 성수침의 아들이다. 그는 초야에 묻혀 살면서도 세상에 이름이 높았던 아버지를 본받아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파주에서 살았다. ‘우계(牛溪)’는 그가 살았던 파주군 파평면 늘로리의 앞 냇물 이름에서 빌려왔다. 율곡 집안의 농장이 파평면에 있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두 사람이 교분을 맺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사람들은 뛰어난 인재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직접 찾아가서 인사를 나누거나 편지를 보내서 만났다. 1년 연상인 성혼이 율곡에게 편지를 보내 스승이 되어 달라고 간청한 것이 두 사람이 벗트게 된 계기였다. 율곡이 성혼을 처음 만난 것은 모친의 삼년상을 마친 19살 때로 금강산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이후로 두 사람의 우정은 죽는 날까지 이어졌다.

남의 단점과 실수를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까다로운 성격 탓에 율곡의 교우 관계는 그리 원만한 편이 못 되었다. 그런 율곡이 “나는 성품이 느슨하고 해이해 비록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지만, 우계는 알고 난 다음에는 곧 하나하나 실천하여 실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라고 칭찬할 정도로 성혼을 높게 보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때의 광경이 어떠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율곡이 43세이던 해 눈 오는 겨울에 소를 타고 우계를 찾아간 날을 기록한 듯싶은 시가 남아 전한다.

 

한 해가 저물어 눈이 산에 가득한데

들길은 가늘게 교목 숲 사이로 갈렸구나.

소타고 어깨 들썩이며 어디를 가나

우계 물굽이에 미인을 그리워했다네.

느지막이 사립문 두드리며 청초한 분 인사하곤

작은 방에 베옷 걸치고 방석에 앉았네.

긴 밤 고요히 잠 못 이루고 앉았노라니

벽 위에 푸르른 등불만 깜박이네.

반생에 슬픈 이별만 많아

산 너머 험한 세상길 다시금 생각하네.

이야기 끝에 뒤치다보니 새벽닭 울어

눈 들자 창문 가득 서릿달만 차가워라.

 

온 산에 눈이 가득한 날, 교목 숲 사이로 갈라진 들길을 따라 우계에 사는 미인(성혼)을 찾아갔다. 말을 탄 것도 아니고 소를 타고 갔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겨울이라 해가 일찍 저물어 이내 밤이 되었다. 우계의 집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작은 방석에 마주 앉았다. 베옷을 입은 성혼과 마주앉아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등잔불에 담아 놓은 기름이 다 타들어갔다. 바람에 깜박이는 등잔불이 어쩌면 동인, 서인으로 나뉘어 치열한 정쟁을 벌이는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닮은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다. 이런 세상에 이 친구마저 없었다면 어찌 견디었을까. 어느새 날이 밝아오는 듯 새벽닭이 울고 창문에는 서리 달만 차갑게 떠 있다.

율곡과 우계는 서로를 깊이 신뢰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언젠가 한 선비가 율곡을 찾아갔는데, 율곡이 술에 취해 누워서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 그 선비가 율곡을 찾아간 것을 후회하고 돌아와 우계에게 자기가 겪은 일을 알렸다. 그러자 우계가

“이 친구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다. 필경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 그날 성상께서 궁궐에서 빚은 귀중한 술을 하사한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고는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였더니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 이런 일화가 말해주듯이 율곡과 우계는 마음으로 깊이 사귄 벗, 즉 심우(心友)였다.
율곡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임금에게 우계를 추천했는데, 『선조실록』선조 13년(1580) 12월 18일자에 이런 내용이 보인다.

“상께서 성혼에게 특별하게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대우하신 것은 근세에 드문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그 사람을 꼭 쓰시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한번 만나보는 데 그치시려는 것입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성혼의 어진 덕은 나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다만 그의 재능이 어떤지를 알지 못할 뿐이다.”

하였는데, 이이가 아뢰기를,

“재능도 한 가지로 논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도 능히 경세제민(經世濟民: 세상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의 책임을 맡아 볼 사람이 있고 선을 좋아해서 능히 많은 아랫사람을 포용해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혼의 재능을 능히 천하를 경륜할 만하다고 평가한다면 지나칠지도 모르나 그 위인이 본디 선을 좋아합니다. 선을 좋아하면 천하도 다스릴 수 있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어찌 쓸 만한 재목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몸에 고질병이 있어 필시 헌관(憲官)의 직책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이 사람을 반드시 한가한 자리에 붙인 후에 때때로 경석에 입시하게 하면 선한 도를 개진하는 데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율곡이 생각하기에 우계는 선하기 때문에 천하를 다스릴 수 있을 만한 재능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다만 고질병이 있어서 건강하지 않으니 한가한 벼슬을 내려주고 이따금 불러서 의견을 구하라는 답변이다. 사실 성혼은 약관의 나이에 병을 얻어 평생토록 병마와 싸우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조선의 이름난 유학자들 중 퇴계 이황과 우계 성혼 두 사람보다 더 많은 병을 앓은 분이 없다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율곡은 임금이 우계를 이따금 만나는 것만으로도 선한 도를 널리 펼치는 데 보탬이 될 거라고 믿었다. 율곡이 우계를 얼마나 깊이 신뢰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1583년(선조 16) 조정에서는 병조판서 율곡 이이에 대한 탄핵이 열흘째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율곡은 과로로 인해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마침 임금이 변방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병조의 당상관을 불렀을 때, 내병조까지 왔다가 현기증이 일어나서 가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의 관리들이 ‘이이는 임금을 업신여겼으니 용서치 못할 죄를 지었고 나라를 그르칠 소인’이라며 일제히 탄핵을 시작했다. 결국 율곡은 조정의 여론에 밀려 이 해 6월에 병조판서를 그만두게 되었다. 율곡은 파주 율곡리에 머물다가 해주로 돌아갔다.

이때 조정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성혼이 율곡을 옹호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당시 성혼은 종삼품의 무관 벼슬이었는데, 상소문을 올려 율곡을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성혼은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오히려 임금을 저버리는 행위라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신이 삼가 이이의 사람됨을 보건대, 생각이 넓고 기질이 민첩한 데다가 타고난 성품이 고상하여 어려서부터 구도(求道)하는 뜻을 가졌으며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 분발하니, 비록 세상의 그 많은 이치를 골고루 안다고 할 수 없으나 의리라고 하는 큰 원칙은 확립되어 있사옵니다. 서재에 들어앉아서 글이나 외고 문장이나 해석하는 그런 썩은 유생들과는 질적으로 다르옵니다.(중략)
그는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것이 최상의 목표라는 것을 알 뿐이고, 자신에게 미칠 화근에 대해서는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은 믿사옵니다. 그는 어려운 때를 당하면 그것을 구제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지 자신의 몸을 후환으로부터 보전하려는 계획을 가질 겨를이 없었사옵니다. 이것이 그의 본래의 사람됨입니다.

우계는 율곡이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를 염려하는 사람이므로 정치적 안위만을 도모하는 썩은 유생들과는 사람됨이 다르다고 변호했다. 우계가 율곡을 얼마나 깊이 신뢰했는지 확연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우계의 상소문은 흔들리고 있던 선조의 마음을 다시 율곡 이이에게 향하게 만들었다. 탄핵을 주도한 대사간 송응개와 도승지 박근원, 신진 관리 허봉을 유배에 처했다. 율곡을 조정에서 몰아내려 했던 동인 세력의 중심인물 세 명이 나란히 유배에 처해진 이 사건을 ‘계미삼찬’이라고 한다.

계미삼찬 이후 선조는 율곡의 복직을 명하는 간절한 비답을 여러 차례 내렸다. 하지만 율곡은 선조의 부름에 응할 수 없었다. 병조판서에서 파직된 지 석 달 후인 1584년(선조 17) 1월,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율곡의 부음이 전해졌을 때 우계는 율곡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꺼내들고 피울음을 토해내었다.

아, 나는 실로 어리석고 혼몽하여 고질병까지 겹쳤습니다. 처음 형을 만나 다소 도(道)를 듣고는 스승으로 섬기려고까지 하였으니, 그렇다면 형에게서 얻은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래에 늙어가면서 정의(情義)에 있어 서로 신뢰하여 더욱 깊어지고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하고 연마함에 있어 서로 도움이 되어 더욱 절실해졌으니, 내가 만약 형이 없었다면 자립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중략)

옛날 편지를 다시 꺼내어 펴보니, 나에게 벼슬하는 의리에 대해 간곡하게 말씀해 주었는데, 그 말씀이 깊고 간절하여 나도 모르게 편지를 쥐고 울었습니다. 형은 그토록 나를 벼슬에 머무르도록 하였으면서 자신은 어찌 머물지 아니한 채 돌아보거나 연연해함이 없이 차마 군부(君父)를 버리고 떠나간단 말입니까.

스승과도 같았던 친구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남겨진 우계에게는 이제 삶이 고통이었다. 율곡이 그리워서 편지를 다시 꺼내보는 밤, 우계는 자신도 모르게 편지를 움켜쥐고 눈물을 흘렸다. 제문(祭文)만으로는 애통함을 달랠 수 없었던 우계는 만사를 지으며 비통해했다.

하늘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대도(大道)가 끝내 캄캄해져

백성들은 의지할 데를 잃었구나.

살아 있음이 고통인 줄 알겠구나

태허(太虛)로 돌아간 것이 즐거움이니

곧 지하에서 만날 것이니

길이길이 처음 뜻을 이루어보세.

 

친구의 죽음은 커다란 도가 사라지는 것이며, 백성들에게는 의지할 데를 잃는 참혹한 슬픔이었다. 친구가 없는 세상에서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임에 절망하면서도 우계는 율곡과 저승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었다. 우계는 율곡의 기일(忌日)이 되면 늘 소복을 입고 지내면서 한평생을 함께 걸었던 친구 생각으로 슬픔에 젖곤 했다.
율곡이 서거한 후에 당쟁으로 옥에 갇혔다가 얼마 후에 풀려 난 우계는 1585년에 율곡의 무덤을 찾아 곡을 했다. 그러고는 율곡 작품의 운을 빌린 시를 지어 친구인 구봉 송익필에게 보냈다. 우계가 지은 시는 이렇다.

세태는 사람 따라 변하고

수심은 늙어갈수록 새롭다.

어이 알았으랴. 뒤에 죽을 사람 되어

그대 시 읽고 상심하게 될 줄을

 

우계는 평소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자신이 율곡보다 먼저 세상을 뜰 거라고 여겼다. 살아서 친구의 죽음을 겪는 것보다 차라리 먼저 이승과 하직하는 것이 더 행복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율곡은 가고 자신은 남았다. 이 시는 그런 참담함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