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척기(兪拓基, 1691-1767)


유척기(兪拓基, 1691-1767)                                  PDF Download

 

려서 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 1662년-1713)에게서 배웠다. 스승 김창즙은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당시 형 김창집(昌集), 김창협(昌協), 김창흡(昌翕), 김창업(昌業)과 함께 문장대가로 평가를 받았으며, 막내 동생 김창립(金昌立)과 함께 육창(六昌)이라 불렸다.

김창즙은 1684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교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였고,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사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00년 아버지의 유문인 『문곡집(文谷集)』을 간행했고, 1710년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를 지냈다. 문장과 훈고(訓詁)에 능하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우(李㘾)는 유척기의 유교인 ⌈지수재집(知守齋集)⌋의 발문에서 유척기가 어렸을 적에 포음 김창즙에게서 배웠는데, 김창즙이 국기(國器)로서 칭찬하고 격려하였다고 적고 있다.

자는 전보(展甫)이고 호는 지수재(知守齋)로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할아버지는 대사헌 유철(柳㯙)이고 아버지는 목사 유명악(柳命岳)이며, 어머니는 이두악(李斗岳)의 딸이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1714년(숙종 4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이 된 후 정언(正言), 수찬, 이조정랑,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세제(世弟)를 책립하자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신임사화 때 소론의 언관 이거원(李巨源)의 탄핵을 받고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집권으로 풀려나서 이조참의, 대사간을 역임하고 이듬해 승지로 참찬관을 겸하다가 경상도관찰사, 양주목사, 함경도관찰사, 도승지,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세자시강원빈객(世子侍講院賓客), 평안도관찰사, 호조판서 등을 두루 지냈다.

1739년 우의정에 오르자, 신임사화 때 세자 책봉 문제로 연좌되어 죽은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두 대신의 복관(復官)을 건의해 신원(伸寃)시켰다.

앞서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등극하는데, 노론은 경종 즉위 뒤 1년 만에 연잉군(延礽君:뒤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소론측은 노론의 대리청정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탄핵하여 정국을 주도하면서 소론정권을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노론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告變事件)이 발생한다. 고변으로 인해 8개월간에 걸쳐 국문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화를 입었다. 이 옥사는 노소론간의 대립이 경종 즉위 후 왕에 대한 충역 시비의 형태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서, 그 자체는 경종대의 문제였지만, 그에 대한 평가 문제는 영조대에 탕평책(蕩平策)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논란이 계속되었다.

한편 유척기는 신임사화의 중심인물인 유봉휘(柳鳳輝), 조태구(趙泰耉) 등의 죄를 공정히 다스릴 것을 주청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그 때 평소 가깝게 지내던 당시의 명류(名流) 조관빈(趙觀彬)·김진상(金鎭商)·이기진(李箕鎭) 등도 벼슬을 그만두었다. 이천보(李天輔)가 영의정에서 물러나자 영조에 의해 중용되어 영상으로 임명되었다. 1760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고, 이어서 봉조하(奉朝賀)를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기국(器局)이 중후하고 고금의 일에 박통했으며, 대신의 기풍을 지닌 노론 중의 온건파에 속하였다. 당대의 명필가요 금석학(金石學)의 권위자이기도 하였다. 글씨로는 경주의 「신라시조왕비(新羅始祖王碑)」, 청주의 「만동묘비(萬東廟碑)」 등을 남겼다.

「영조실록」 43년에 유척기의 졸기가 실려 있다.

“봉조하 유척기(兪拓基)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연석(筵席)에서 애석해 한탄하고 꿈에서 보았다는 하교까지 하면서,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시호(諡號)를 의논하라고 하였다. 문익(文翼)이란 시호를 내렸다. 유척기는 너그럽고 후덕하여 대신다운 도량이 있었으므로, 위아래가 의지하며 중히 여겨 온 지 거의 수십 년이나 되었다.”

짧은 이 글에서도 유척기에 대한 영조의 신망과 동료들의 인망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저서로는 「지수재집(知守齋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