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석(金載石)1895~1971 – (제2편)


김재석(金載石)-(제2편)                                           PDF Download

 

1895(고종 32)~1971. 근대의 학자이다.

관은 울산(蔚山). 자는 경담(景潭), 호는 월담(月潭)이다. 그는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이자 간재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순창과 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재야 유림이었다. 김인후로 이어지는 가학 전통과 간재의 학문을 계승하려는 그의 노력은 유학자적 면모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당시의 엄혹한 역사 현실을 무시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항일의병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유학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지사적 유림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재석은 타고난 자질이 비범하고 매우 총명했다고 전해진다. 8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의 명에 따라 ‘구름’을 소재로 시를 지었는데 그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구름 덮이니 하늘은 낮아지는 듯
雲浮天似低

그 구름 걷히니 다시 높아지네.
雲散天還高

본체는 항시 변함없으니
本體恒無變

본성을 회복하는 일 힘들다 마오.
復初莫說勞

 

첫 구절의 ‘구름 낀 하늘’과 둘째 구절의 ‘구름 걷힌 하늘’에 대한 묘사는 사실적이고 평담한 맛이지만, ‘구름 낀 하늘’과 ‘구름 걷힌 하늘’이 셋째 구절의 ‘본체’, 넷째 구절의 ‘복초’와 연결됨으로써 함축적이고 의미있는 도풍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그의 「월담유고(月潭遺稿)」에 수록되어 있는 「자경십도(自警十圖)」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자경십도」는 「월담유고」권3, 「잡저」에 수록되어 있다. 김재석이 간재 전우의 학문을 계승한 성과는 「자경십도」에 담겨있다. 「자경십도」는 간재의 가르침에 따라 ‘소심존성(小心尊性)’의 의미를 밝힌 것으로, 모두 10폭의 그림(圖)과 설명(說)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경십도」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 사일(事一), 제2 삼외(三猥), 제3 삼요(三要), 제4 사극(四克)은 존심지방(存心之方) 즉 공부론을 밝힌 것이고, 제5 인체(仁體), 제6 지경(持敬), 제7 서학(恕學), 제8 위미(危微) 역시 ‘존심지방’의 의미를 미루어 밝힌 것이므로 공부론의 확장이며, 제9 총도(總圖), 제10 체용(體用)은 작가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제1부터 제8까지는 김재석 자신의 독창적 학문과 사유의 산물이라고 보기보다는 간재의 가르침을 도설로 풀어 설명한 것이고, 제9는 간재의 가르침에 김재석이 보충한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제10은 김재석 스스로 지어 도합 십도(十圖)를 구성한 것이다.

「자경십도」의 내용은 대부분 ‘소심존성’의 성리학적 의미를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발명하기 보다는 일상생활에서 유학자들이 견지해야 할 공부를 비교적 평이하게 설명하고 있다. 「자경십도」는 아마도 간재의 문집 곳곳에 보이는 ‘모모자경(某某自警)’이라는 글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흔적을 간재의 문집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예컨대 제1 사일도(事一圖)의 내용은 「간재사고(艮齋私稿)」권32에 보이는 「원적사자경(圓寂寺自警)」과 그 취지가 매우 흡사하다. ‘사일도’의 오른편에 위치한 해설에서

“우리 인간은 천지로부터 지선(至善)의 본성을 품수받았고 성현으로부터 인의(仁義)의 가르침을 받들고 있으며 임금과 어버이에게는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를 입었다”

라고 했는데, 간재의 「원적사자경」에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보인다. 즉

“매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먼저 천지와 부모와 임금과 스승께서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가르쳐주신 은혜를 생각해야 한다”

고 했는데, 이 두 구절은 그 내용과 논리가 일맥상통한다.

김재석이 밝히고 있듯이, 「자경십도」에는 간재의 ‘소심존성설’을 해명한 도설이 있다. 예컨대 제1 사일도(事一圖)에서

“지금은 이기(理氣)와 의리(義利)의 분변에 밝고, 성심(性心)과 본말(本末)의 영역을 구분하며,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극복하는 공부가 성현과 군부의 마음에 이와 같음이 있어야 할 뿐이다”

라고 했다.

이 구절은 「자경십도」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특히 성(性)과 심(心)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성을 지존무대(至尊無待)의 본체로 심은 지령불매(至靈不昧)의 묘용으로 그 관계를 확정한 것은 간재의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의 요체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을 절대적인 본체로 간주함으로써 심보다 우선하는 지위를 부여한 것은 구한말 ‘심’을 위주로 전개되던 성리학, 특히 한주 이진상(李震相)과 화서 이항로(李恒老) 등의 입장에 대한 간재의 반격과 비판의 핵심이론이다. ‘사일도’의 이 구절은 간재의 ‘성사심제설’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은 「자경십도」 제3 삼요도(三要圖)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삼요도에서 김재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의 본체는 비록 선하지만, 그렇지만 성을 받들어 따라야 하는 것이지 갑자기 도체가 될 수는 없다. 기질의 본체는 비록 맑지만 마음을 가리지 않아야 하며 갑자기 영각(靈覺)이 될 수는 없다.”

삼요도는 간재의 성리학적 입장, 즉 기호 낙론의 입장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심은 성을 받들어 따라야 한다”는 주장과 “기질은 마음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삼요도에서 기호 낙론의 입장을 따르는 간재의 입장과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김재석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김재석은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에 의해 침탈되고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조선의 역사를 직접 체험한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때로는 적극적으로 독립활동에 참여하며 주어진 역사가 아니라 스스로 주도하고 해석하는 역사를 살아왔다. 재야 유학자로서 그가 보인 우국충절은 당시의 역사적 현실에서 매우 값진 의미를 갖는다. 비록 그의 학문이 독창적인 성리학 체계와 의미를 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간재의 학술을 계승하고 기호 낙론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서 김인후와 자연당 김시서로부터 그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가학을 지키고 선조들의 규범과 가치를 끊임없이 발양하는 그의 행동은 향촌 사회의 모범을 수립하려는 사림 본연의 일이기도 하다.

끝으로 그가 생을 마치기 불과 몇 년 전에 지은 한편의 시를 은미하면서 그가 평생 추구했던 삶과 학문의 목표가 어디에 놓여 있었는지를 확인해 본다.

 

돌을 쪼아 옥 만들기를
先君期待意

선군은 기해댔건만
將石欲玉成

머리 하얗게 센 오늘까지도
白首今何事

본성 회복하는 일 밝히지 못했네.
復初尙未明

 

[참고문헌]

「월담 김재석의 생애와 학문」(간재학논총「제6집, 소현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