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헌회(任憲晦, 1811-1876)


임헌회(任憲晦, 1811-1876)                                 PDF Download

 

임헌회는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이다. 아버지는 천모(天模)이다.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 등의 문인이다.

송치규는 송시열(宋時烈)의 6대손으로 김정묵(金正默)의 문인이다. 학문은 독서궁리(讀書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반궁실천(反窮實踐)을 목표로 삼았다. 평생을 이이(李珥)와 김장생(金長生)·송시열의 전통을 이어받아 지키는 데 전념하였다.

1798년(정조 22) 경상도관찰사 한용화(韓用和)의 천거로 영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원자궁강학청료(元子宮講學請僚), 1800년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와 호조좌랑, 1801년(순조 1) 사헌부지평 등에 잇따라 임명되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1804년 군자감정(軍資監正), 이듬해 사헌부집의, 1812년 세자시강원진선·공조참의, 1815년 시강원찬선·공조참판, 1816년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당대의 거유로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평생을 두고 벼슬을 사양한 것은 스승 김정묵이 뜻하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유적(儒籍)에서 제적되었기 때문으로 전한다.

 

홍직필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7세 때 이미 문장을 지었다. 17세에는 이학(理學)에 밝아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 올바른 도를 맡길 만함.)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오희상(吳熙常)과 가장 오래 교유했는데, 그로부터 유종(儒宗: 유학자의 으뜸)이라 일컬어졌다. 또한 이봉수(李鳳秀)로부터는 학문이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다. 학문은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육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의 심선악설(心善惡說)을 반대하고 임성주(任聖周)의 “성선(性善)은 곧 기질(氣質)이다.”고 한 주장에도 반대하였다.

임헌회는 1858년(철종 9)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다시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전라도사·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61년 조두순(趙斗淳) 등의 천거로 경연관에 발탁되었으나 역시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1864년(고종 1) 장령·집의·장악정(掌樂正)이 되었고,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 때 만동묘(萬東廟)의 제향을 폐지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절대 부당함을 재삼 상소하여 다시 제향하게 하였다. 1874년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뒤 대사헌·좨주 등에 임명되었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 하여 그의 제자인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윤용선(尹容善)의 주청으로 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고산문집(鼓山文集)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고제 전우는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 당시의 거유(巨儒)인 신응조(申應朝)의 권고로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에게서 20년 간 배웠다. 윤치중(尹致中)ㆍ서정순(徐廷淳)과 함께 임헌회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학풍은 철저히 이이(李珥)ㆍ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1882년(고종 19) 문벌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ㆍ장령(掌令), 1906년(광무 10) 중추원 참의(中樞院參議) 등 보직이 있었으나 다 사퇴하고 말년에는 자손들도 버리고 서해의 계화도(界火島)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고산문집⌋은 20권 10책, 속집 4권 3책, 부록 3권 3책, 합 27권 16책으로 목활자본이다. 1883년(고종 20) 임헌회의 문인 전우(田愚) 등이 편집하여 행했으며 부록은 1932년 김종학(金鍾學)이 간행하였다. 1937년 이인구(李仁矩)가 『전재문집(全齋文集)』이라는 제목으로 석판본 20권 10책을 간행했는데, 내용은 『고산문집』과 대동소이하며, 다만 편차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서(書)는 그의 스승인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을 위시하여 김매순(金邁淳)·홍석주(洪奭周) 및 사우(士友) 조병덕(趙秉悳)·신응조(申應朝)·홍일순(洪一純)·김평묵(金平默)·이응진(李應辰)·소휘면(蘇輝冕), 그리고 문인 전우·서정순(徐政淳)·윤치중(尹致中) 등과 주고받은 것으로, 주로 경전·예설(禮說)·성리설·태극·심성(心性)·이기(理氣) 등에 관한 논술이 많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김평묵과 왕래한 서한은 ‘명덕(明德)’에 대한 기본적 견해가 명덕주기설(明德主氣說)과 명덕주리설(明德主理說)로 차이를 나타내면서 새로운 학파적 논변으로 발전되었다.

임헌회가 명덕을 심(心)으로 파악한 점은 화서학파와 같은 입장이었지만,

“명덕이 중리(衆理)를 갖추고 있으며 만사(萬事)에 응한다.”

는 점을 심(心)의 체(體)와 용(用)으로 파악하였다. 명덕은 비록 형이하(形而下)이지만, 갖추어져 있는 바의 이(理)는 곧 형이상이다. 그런 점에서 심(心)은 형이하라고 말할 수 있지만, 갖추어져 있는바 소이연(所以然)으로 말한다면 형이상으로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명덕주리·주기의 분별은 명덕의 유위(有爲)·무위(無爲)의 여부를 관찰하여보면 알 수 있는데, 이(理)가 정의(情意)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관찰하여보면, 명덕은 정의가 있고 지각(知覺)이 있는 물사(物事)이며 이(理)는 단지 정의와 지각이 없는 물사이다. 따라서 명덕은 주기적인 입장에서 파악해야 하며, 주기적인 입장이라고 하여 이(理)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임헌회는 심(心)을 이(理)로 파악하는 김평묵 등의 논의는 기(氣) 위에 나아가 이(理)를 파악하지 않고 오로지 명덕에 갖추어져 있는 이(理)와 명덕의 허령불매(虛靈不昧: 마음이 거울같이 맑고 영묘하여 무엇이나 뚜렷이 비추어 일체의 대상을 명찰함)한 상태를 함께 이(理)로 파악하는 모순을 범했다고 지적하였다.

 

조병덕에게 답한 서한에서는 「맹자」의 ‘생지위성(生之謂性)’에 대해

“생한 것을 성(性)이라고 이른다는 말은 대체로 생하기 전에는 성을 말할 수 없으며, 생이 있는 후에야 비로소 성이라 말할 수 있다.”

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잡저 가운데 「이계(二誡)」는 부모의 상례(喪禮)를 성경(誠敬)으로 하고, 내외(內外)를 엄하게 해서 가도(家道)를 바르게 하라는 가법을 전하고 있다. 「예의쇄록(禮儀瑣錄)」은 당시 시행되고 있던 상제례(喪祭禮)의 불합리한 점을 논한 것이며, 「제찬도설(祭饌圖說)」·「거상의(居喪議)」·「조주체봉의(祧主遞奉儀)」·「조주매안의(祧主埋安儀)」 등에서는 상제의식(喪祭儀式)에 관한 해설과 도식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간서잡록(看書雜錄)」·「경의쇄록(經義瑣錄)」은 경전상의 난해한 어구에 대하여 제현의 설을 인용하고 고증·분석하였다. 「매산선생어록(梅山先生語錄)」은 홍직필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평소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전 가운데 「화망건선생전(畫網巾先生傳)」은 명나라가 멸망한 뒤 춘추대의를 지켜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망건선생의 일화를 기록한 글로 조선 후기 위정척사론자(衛正斥邪論者)의 대명관(對明觀)을 알 수 있는 글이다. 여기서 임헌회가 대명유민(大明遺民)으로 자처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전재문집(全齋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