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오(朴文五, 1835-1899)


박문오(朴文五, 1835-1899)                                 PDF Download

 

박문오는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대화(大化), 호는 성암(誠菴)이다. 아버지는 박도정(朴道精)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형 박문일과 함께 관서지방에서 당시 으뜸가는 학자라는 찬양을 받았다.

스승 이항로는 1808년(순조 8) 반시(泮試: 한성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권력층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의 친근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과장의 출입마저 수치스럽다 하여 끝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그의 이기론(理氣論)은 주리(主理)적 입장을 고수하여 이(理)와 기(氣)는 대등한 개념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이(理)를 중요시하는 그의 주리설(主理說)은 조선이 처한 내우외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순선(純善)을 지향하고 대의(大義)를 실천하는데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영남의 이진상(李震相), 호남의 기정진(奇正鎭)과 더불어 한말 주리철학(主理哲學) 3대가로 일컬어졌다.

이항로의 주리적 입장은 19세기에 발생한 심설논쟁(心說論爭)과 연관된다. 조선 사회 내부의 경제적 사회적 모순의 격화와 서양의 문화적 군사적 충격에 직면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대를 배경으로 심설논쟁이 발생하였다. 당시 유학자들 중 상당수가 조선의 총체적 위기를 극복할 타개책을 모색하면서 그 이념적 지향으로 주재(主宰)하는 이(理)를 중심에 둔 이른바 주리(主理)적 입장을 취하였다.

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역의 한주학파(寒洲學派)에서 주장하는 심즉리(心卽理), 존화양이(尊華攘夷)를 소리 높여 외친 호남과 강우지역의 노사학파(蘆沙學派)에서 주장하는 심지명덕(心之明德), 위정척사의 맹장들을 많이 배출한 기호지역의 화서학파(華西學派)에서 주장하는 심주리(心主理) 등이다.

이항로는 주리철학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한말(韓末) 위정척사(衛正斥邪) 의리론(義理論)의 대표자로서 일본과 서양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식의 선봉이 되었다. 그의 문하(門下)에서 척사위정(斥邪爲正)과 창의호국(倡義護國)의 중심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중 박문오와 그의 형 박문일은 관서지방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화서학파가 관서지방에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박문오는 경학(經學) 연구에 전심하는 한편,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다. 고종 때 판서 남정철(南廷哲)이 기자묘수호소(箕子墓守護所)를 설치하여 도내에서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인사를 뽑을 때 입직수호생(入直守護生)과 주학교수(州學敎授)로 임명되자 사퇴하였다가 주위의 권유로 보름 동안 근무한 적이 있었다. 뒤에 덕천군수를 지냈다. 저서로는『성암집(誠菴集)』이 있다.

 

성암집은 4권 4책으로 된 활자본이다. 1904년 아들 동흠(東欽)이 편집하고 제자 이윤실(李允實)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학진(金鶴鎭)의 서문과 권말에 박은식(朴殷植)과 김병훈(金秉熏)의 발문이 있다.

서(書)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학문을 하는 데 필요한 지경궁리(持敬窮理) 또는 수정지방(守靜之方)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한 것과 시세에 관한 의견을 적어 수령들에게 보낸 것이 많다. 소에는 교수를 맡을 학행 있는 선비를 천거하라는 왕의 하교에 대한 회답 상소가 있다.

잡저 중 「존심양성설(存心養性說)」에서는 존(存)과 양(養)은 사(事)이고 심(心)과 성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므로 존심양성은 곧 하늘을 섬기는 일이라 전제하고, 애친(愛親)하는 마음을 보존하여 양인(養仁)하는 성을 삼으며 경군(敬君)하는 마음을 보존하여 의(義)의 성(性)을 기르는 것이라고 하는 등 척사의 입장에서 유학이론을 천명하였다.

이기설(理氣說)」에서는 주자(朱子)의 말을 인용, 마음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이 하나이지만 혹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나고 혹은 성명(性命)의 바른 것에 근원한다고 전제하고 이황(李滉) 등의 설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길로 가는 데 각기 중한 것을 취한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이밖에 성리(性理)를 설명한 「천리인욕변(天理人慾辨)」과 「심성정의변(心性情意辨)」이 있다.

 

<참고문헌>

성암집(誠菴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