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두산(蘇斗山, 1627-1693)


소두산(蘇斗山, 1627-1693)                                  PDF Download
소두산의 위패를 모신 익산의 화산서원 사진
소두산의 위패를 모신 익산의 화산서원

 

두산(蘇斗山, 1627-1693)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으로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  ⌈춘추⌋를 배우고 크게 될 인물로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하는 중에 임금에게 올린 직언을 싫어하는 권신들의 견제를 받고서 천군수, 나주목사, 강릉부사, 동래부사등 외직으로 돌았다. 외직에 있을 때도 탐관오리이며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중시하였던 점,  궁중의 문제점을 자주 지적했던 점,  백성들의 입장에서 제도개혁을 하고자 했던 점, 강릉 부사 시절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던 점을 생각해보면 그러한 비판은 신중하게 평가해 볼 필요가있다.

1627년(1세, 인조5년) 11월 19일에 익산의 제산(濟山)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망여(望如), 호는 월주(月洲)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소건(蘇建), 할아버지는 소억선(蘇億善),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소동명(蘇東鳴)이다.
송시열에게 학문을 배웠다.

1643년(17세, 인조21년) 약관이 되어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예식을 하였다.  향시에 잇달아 합격하였으며 이즈음 ⌈춘추 ⌋를 공부하였다.

1646년(20세, 인조24년) 창신교위(彰信校尉) 권식(權植)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결혼하였다.  2년뒤,  모친상을 당하여 탄곡(炭谷)에 장사를지냈다.

1652년(26세,효종3년) 증광(增廣) 진사초시(進士初試)와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다음해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춘추 ⌋를 배웠다.  송준길과 송시열에게 대기(大器, 크게될인물)로 인정을 받았다.

1657년(31세,효종8년) 태학(太學, 성균관)에 들어갔다.  2년후,  서울에 머물던 스승 송시열에게 매일 ⌈춘추⌋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

1660년(34세,현종1년) 1월 유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율곡(栗谷) 이이,우계(牛溪) 성혼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청했다. 4월,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  6월, 감찰에 임명되었다가 곧 공조좌랑이 되어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다. 8월에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다음달, 병조정랑겸 춘추관 기주관이 되었다.

1662년(36세,현종3년) 6월,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정언이 되었다.  궁궐왕족의 폐단을 논하고, 충청수영(忠淸水營)의 소금과 쌀의 지가(紙價) 폐단을 들추어내 개혁했다.  7월, 외직인충청(忠淸) 도사(都事)로임명되었다.

1663년(37세,현종4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정언으로있을때 대사간 서필원(徐必遠)의 잘못을 임금에게 직언해 해임시켰다.  또송 시열을 비방한 홍우원(洪宇遠)의 잘못을 임금에게 고했다. 이러한 일들로 권력을 가진 고위관료들의 미움을 받았다.  9월에서천(舒川) 군수가 되었고, 이후 주로 외직으로 돌았다.  다음해 서천군 수직에서 파직되었다.  그 다음해(1665년) 다시 지평으로
임명되었다.

1666년(40세,현종7년) 임금의 온천 행차시 수행하는 여러 신하들과 내시(內侍)들에게 내리는 품계 승진을 줄이도록 청하였다. 유세철(柳世哲)을 논계하고,  강석빈(姜碩賓) 파직을 청하였다. 7월에 장령이 되었다가 9월에 다시 정언으로 임명되었다. 다음해 이숙(李䎘) 등 일곱간신(諫臣)의 소환을 요청 했다가 해직되었다.  다시장령으로 임명되었는데 내시의 잘못을 간언하다 또 해직되어 전라도 장성(長城)의
부사로 나갔다가 다시 나주목사로 나갔다.

1672년(46세,현종13년)  나주목사로 재임하고 있을때, 백성 구제활동을 잘하여 상을 받았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임명되었다.  8월에부친의 노환을 이유로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 2월에 송준길(宋浚吉)의 사망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

1675년(49세,숙종1년) 아들을 보내 송시열의 무고(誣告)를 변론하게하였다.  제주 목사에 임명되었다. 9월, 장기(長鬐)송시열에게 약재(藥材)를 보냈다.  12월에 홍우원(洪宇遠)의 대계(臺啓, 관리들의 잘못을 임금에게 보고 하는글)로 관직이 박탈되었다.

1676년(50세,숙종2년) 귀향하여 시를 지으며 가슴에 담긴 답답함을 풀었다. 거처의 이름을 거백옥(蘧伯玉)의 고사에서 따와 ‘사구당(四九堂)’이라고 지었다.  2년 뒤,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가 송시열에 대한 죄목 추가가 논의되면서 다시 관직이 박탈되고 금고형에 처해졌다.

1680년(54세,숙종6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정세가 다시 바뀌었다. 남인들이 대거 실각하고 서인들이 복권되었다. 소두산은 강릉 부사에 임명되고 임금으로 부터 ⌈고문진보(古文眞寶) ⌋를 하사받았다. 강릉 부사시절에 는근면하고,  이속(吏屬)을 엄하게 다스리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이후 의주 부윤(義州府尹), 상주 목사(尙州牧使) 등에 잇달아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3년(57세,숙종9년)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다. 왜관에 사는 일본인들의 규율 준수와 밀무역 금지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약조를 대마도(對馬藩) 도주와 체결하는데 관여하였다.  또 춘분과 추분 그리고 백중에 초량 왜관의 왜인들이 두모포 왜관으로 성묘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장계를 올려 허락을 받았다

1684년(58세,숙종10년) 공홍도(公洪道)  관찰사(觀察使), 공홍도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1688년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외직을 돌면서 그는 시를 많이썼다.  그의 문집, ⌈월주집(月洲集) ⌋에는 병사들의 해상훈련을 노래한 ⌈수조후차최진사운(水操後次崔進士韻)⌋, 육상훈련을 주제로 노래한 ⌈육조후호운
(陸操後呼韻)⌋ 등이 들어있다.  또 ⌈등통군정(登統軍亭)⌋ 등 변경지대의 모습을 담은 시도 적지 않다.  부인 권씨가 이해에 사망하였다.  다음해 경주 최씨와 재혼하였다.

1689년(63세,숙종15년) 소의(昭儀) 장씨가 낳은 아들을 왕세자로 삼는 문제로 정국이 시끄러웠다. 숙종은 장씨를 희빈으로 책봉하고 이에 반대한 서인들을 관직에서 쫓아냈다. (기사환국己巳換局) 또 송시열을 제주도에 유배 시켰다가 사약을 내려 사형에 처했다.  김수항(金壽恒), 민유중(閔維重)도 귀양을 갔다.  남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소두산은 4월에 무고(誣告)를 당해, 낙향하였다. 6월에 송시열의 발인에 참석하였으며,  이해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출향(黜享, 배향했던 위패를 거두어 치우는일) 소식을 듣고 아들과 동생을 시켜 무고를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리게 하였다. 다음해 무고를 받아 조사를 받고 금고형에 처해졌다.
그가 지은 시문 중에 이러한 것이 있다.

草綠江潭雨  초록빛 강가에 비가 내리니
騷人萬古愁  시인의 마음은 만고의 수심.
停杯誰問月  술잔 멈추고 누가 달에게 물었을까?
撫跡客登舟  옛 자취 더듬어 나그네는 배에 올라
日落欺山面  해가 지니 산길 찾기 어렵고
潮來失渡頭  조수가 밀려오니 나루터를 잃었네.
長安何處是  한양은 어디에 있을까?
歸思獨憑樓  돌아가고 싶은 마음, 홀로 누각에 기댄다.

1693년(67세,숙종19년) 남인들의 모함을 많이 받아 울분으로 병사하였다. 4월에 진산 천비산(天秘山)에 장사 지냈다가 나중에 전주 지둔산(智屯山) 선영으로 이장되었다.  묘는 전북 완주군 봉동읍 둔산리620-12에 있다. 둔산리 870번지 완주 공단 옆에 신도비가 있다.
1968년에 화산서원(華山書院, 전라북도익산시금마면용순신기길44-76)에배향되었다.  이 서원은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57년에 창건 되었는데, 김장생, 송시열 등이 배향되어있다. 문집으로 『월주집(月洲集)』이 있다.
그는 외직(外職)에 재직할 때 자주 남인들로부터,

“권신들에게 부탁하여 여러번 고을을 다스리며 탐학(貪虐)을 자행하였다.”

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곤 했었다.  서인이 집권할 때에도 대간으로 부터 처신이 신중하지 못하다고 하여 비판을 받았으며, 재임할 때는 탐관오리라는 비난을 받거나 권세를 등에 업고 함부로 시비를 판단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들이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는 좀 더 깊이 조사를 해봐야 할 것이다.  지배계층들이 자행한 횡포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또 궁중의 권력자들이 산이나 바다를 독점한 뒤 시장(柴場), 어장(漁場) 등을 만들어 놓고 농어민을 착취하는 횡포를 근절해 달라는 상소문도 있다.  그외에도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태인, 고부 등에서 궁노(宮奴)돌려 주라는 문장도 보인다.  서인과 남인의 대립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 어염(魚鹽), 노비(奴婢), 환곡(還穀) 등의 문제를 다룬 문장도 많다.
그가 지은 시는 오래도록 한시 애호가나 서예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특히 다음과 같은 그의 격양가(擊壤歌)는 요즘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있다.

百年身世生涯足
길어야백년사는신세, 이생애로만족하네.

長作堯衢擊壤翁
오래도록격양가를부르는노인으로살리라.

<참고자료>
⌈월주집 ⌋
⌈소두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소두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