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묵(辛光默, 1872~1949)


신광묵(辛光默, 1872~1949)                               PDF Download

 

18세 때 유인석(柳麟錫)의 제자가 되었다.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은 을미의병의 최고지도자로서 화서학파의 위정척사사상을 위국간난의 때에 온몸을 바쳐 실천하였다. 유인석은 14살 되던 해 족숙(族叔) 유중선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당시 화서 문하에는 임규직, 이인구, 이준,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등의 중요 인물들이 운집해 있었고, 훗날 화서학통을 이어받는 김평묵, 유중교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이를 통해 화서학파의 위정척사, 존화양이사상을 체득 존신하게 된다.

1893년 제천 장담으로 이사를 가는데, 양가의 재당숙인 유중교가 1888년 춘천으로부터 이곳으로 이사와 제자를 양성하던 중 1893년 작고하자 유중교가 닦아 놓은 기반을 흡수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바로 이곳 제천을 거점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게 된다.

신광묵은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자작리에서 태어났으며, 18세 때 유인석(柳麟錫)의 제자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제천에서 유인석이 이끄는 호좌의진(湖左義陣)이 봉기하였을 때 참여하였고, 1907년(순종 1) 군대 해산 이후에 이강년(李康秊)이 다시 의병을 일으키자 좌종사의 직책을 띠고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듬해 이강년이 순국한 후에는 그 시신을 제천으로 반장(返葬)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이후에는 고향에 은둔하여 10여 년간 제자를 기르며 항일 사상 교육을 하였다. 1917년 여름 단양경찰서에 붙잡혀 20여 일 동안 문초를 받기도 하였다. 그때 맏아들 신재교가 옥바라지를 하였는데, 부친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보고 귀가한 후 그 충격으로 피를 토하고 10여 일 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만년에는 향리에 칩거하였다.

유집으로 『학습재집(學習齋集)』이 전하는데, 권3의 「동방용하설(東方用夏說)」과 「척화설(斥和說)」에는 존화양이적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유집은 한말 의병이며 문인이었던 신광묵의 학문과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임과 동시에 문집에 수록된 서간문, 잡저, 제문 등을 통해 제천 화서학파의 동향을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