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운성(韓運聖)


한운성(韓運聖)                                                             PDF Download

 

181802(순조 2)∼1863(철종 14) 조선 후기의 유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문오(文五), 호는 입헌(立軒)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씨를 잘 썼다. 초시(初試)에는 급제하였으나 과거시험에는 실패하였다. 그는 과거시험을 버리고 자신을 위한 학문에 침잠하였다. 부모상을 마친 후에 매산 홍직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 1799~1870)과 편지왕래로써 심성설(心性說)을 논하였다. 이종상은 경주 출신으로, 진사시에 합격한 뒤 장릉참봉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돈녕부주부·한성부판관·용궁현감·강원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862년에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농민들이 크게 일어났을 때, 그는 세상이 피폐한 것을 걱정하고 탄식하였다. 철종 13년에 이에 대한 근본 대책을 전국의 선비들에게 문의했는데, 이때 한운성이 환폐(還弊)·결폐(結弊)·군폐(軍弊)의 시정대책을 올렸을 때는 왕으로부터 책자를 상으로 하사받았다. 그는 서양학문이 국내에 확산되자 이를 사설(邪說)이라고 규정하고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한운성의 저서로는 「입헌문집(立軒文集)」이 있다.

입헌문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한운성의 시문집이다. 16권 8책으로 활자본이다. 아들 한석찬(韓錫瓚)과 한석관(韓錫瓘) 등이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이응진(李應辰)의 발문이 있다. 현재 규장각 도서·성암고서 박물관과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3에는 시 354수, 권4∼13에는 서(書) 366편, 권14에는 서(序) 6편, 기(記) 16편, 발(跋) 6편, 권15에는 제문 14편, 애사 1편, 축문 5편, 묘갈문 2편, 묘표 1편, 시장(諡狀) 1편, 권16에는 소(疏) 2편, 잡저 12편, 부록으로 행장·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시체별로 분류되지 않았고, 대체로 저작 연대순으로 배열되었다. 「과삼탄(過三灘)」·「춘야유감(春夜有感)」·「강상만음(江上謾吟)」·「차공암팔영(次孔巖八詠)」·「석지정사28운(石芝精舍二十八韻)」 등이 역작이다. 칠언율시가 대부분이며, 자신의 빈한하고 불우한 신세를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는 애써 고심하며 읊은 흔적이 많고, 독특한 풍취가 있다기보다는 무미건조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서(書)는 이 책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모두 130여 명에게 보낸 편지다. 스승인 홍직필에게 보낸 편지는 스승을 받들어 그 뜻을 지키겠다는 다짐과 학문하는 방법, 예법에 대해 질문, 토론한 내용이 담겨 있다. 저자는 사서 외에 백가서(百家書)에도 두루 정통하였다. 「중용」과 「대학」에 더욱 공을 들여 늙어서까지 매일 독송하였다고 한다. 특히 예론에 조예가 깊었다.

잡저 가운데 「예설변(禮說辨)」은 당시 논란거리였던, 철종이 왕위에 오른 뒤의 헌종 등에 대한 칭호 문제를 해명한 것이다. 2,500여 자에 이르는 방대한 이 글은 저자의 예학의 깊이를 가늠케 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입헌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