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전(申翊全, 1605-1660)


신익전(申翊全, 1605-1660)                                PDF Download

 

선 4대 문장가의 한 명이요, 인조반정의 주역으로 인조 묘정지신의 한 명인 상촌 신흠(申欽)의 아들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자는 여만(汝萬)이고 호는 동강(東江)이다.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절도사 제신(濟臣)의 딸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국조인물고>에 박세채가 쓴 신익전의 <비명>이 실려 있는데 내용이 상세하다. 신익전은 어려서부터 이미 순박하고 성실하여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열 살 때에 시골에서 부친 신흠을 모시고 있을 적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방문하여 그가 어른처럼 응대(應對)하고 주선(周旋)한 것을 보고 누차 장려(獎勵)하였는데, 이때부터 반드시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송독하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태극도(太極圖)의 부권(副圈)을 보고는 말하기를,

“이것은 음(陰) 가운데 양(陽)이요, 양 가운데 음이다.”

하니, 신흠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한다.

1628년(인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재랑(齋郎)이 되고, 이어 검열·정언·지평 등을 지냈다. 163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청나라 사신이 와서 “신익전과 그의 큰형인 신익성(申翊聖)이 명나라를 도울 뜻이 있었다.” 하여 몇몇 재신(宰臣)들과 함께 끌고 간 것이다. 큰형 신익성은 호란(胡亂)을 당했을 때 의리(義理)를 세움이 매우 컸고, 삼전도(三田渡)에 비(碑)를 세울 때에는 비에 전서(篆書) 글씨 쓰는 것을 힘써 거절하였다. 신익전은 최명길(崔嗚吉)과 함께 기자묘(箕子廟)에 들러 제사지낼 적에 매우 기휘할 만한 말을 주고받았는데, 당시 이계(李烓)가 청나라의 포로(捕虜)로 잡혀가서는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사람들까지 무함(誣陷)하였다. 신익전이 이계의 간악함을 말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와서는 부응교·사인(舍人)·사간을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1639년에는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효종 때 호조·예조·병조의 참판 등을 지내면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그 뒤 한성부의 우윤과 좌윤을 거쳐 도승지에 이르렀다.

지방관으로 나가 선정을 많이 베풀었는데,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갔을 적에,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곳이 아마도 내가 신명을 바칠 곳이리라.”

하고 숨은 장정을 모두 찾아내어 여러 군대의 궐원(闕員)을 보충하고 경내(境內)를 독려하여 기한 내에 조적(糶糴, 환곡(還穀)을 꾸어 주고 받아들이는 일)의 환곡(還穀)을 수납케 한 것이 거의 수만 곡(斛)이었는데도 감히 뒤지는 자가 없었으며, 죽었거나 딴 곳으로 이사하여 절가(絶家)된 경우가 있으면 번번이 모곡(耗穀, 소모될 것을 감안해서 더 받는 곡식)으로써 상환케 하고, 학교를 세워서 제생(諸生)들을 모아 학업을 장려하여 온 고을이 잘 다스려졌으므로 돌아올 때에는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송덕(頌德)하였다 한다.

인조를 이어 즉위한 효종 2년에 김자점의 옥사에서 조귀인(趙貴人)과 김자점(金自點)이 사사되는 상황에서 신익전은 그의 형세가 혐의쩍고 처지가 가까워서 자칫하면 위험한 의심을 받을 뻔했지만 끝내 해를 입지는 않았다. 이를 두고 논자들이

“이때에 능히 충신으로서 스스로를 보전한 이로는, 공이 충익공(忠翼公) 이시백(李時白)과 함께 아름다움을 나란히 할 수 있다.”

하였다. 이시백은 그의 아우 이시방이 김자점과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았다.

박세채가 이를 두고

“만일 쉬움과 어려움을 따진다면 또 분별할 바가 있으니, 이는 어찌 공이 평소에 겸공(謙恭)하고 근확(謹確)했던 증험이 아니겠는가? 아! 훌륭하도다.”

라고 평하면서 신익전의 평소 행실을 밝히길,

“염정(恬靜)을 숭상함에 뜻을 두어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왕실(王室)과 인척 관계를 맺기에 미쳐서는 더욱 삼가하여, 비록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으면서도 담담하기가 마치 초야(草野)에 거처하고 공허(空虛)한 데로 도피하는 것 같았으며, 기미(幾微)를 보고 간략함을 지켜 한결 같이 옛 전적(典籍)에 종사하였으므로, 무릇 속세의 현회(顯晦)ㆍ장부(藏否)는 족히 그의 마음을 얽매지 못하였다.”

라고 하였다.

주역』을 애독하여 깊이 연찬하였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동강유집』 19권 3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