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조(沈潮, 1694-1756)


 

심조(沈潮, 1694-1756)                                           PDF Download

 

상하의 만년 제자이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수제자로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 윤증(尹拯)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렸다. 숙종 연간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여 송시열이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고 이어서 사약(賜藥)을 받게 되는데, 그는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고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향하였다.

학술적으로 그는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애초에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논쟁(同異論爭)인 호락논변이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 제기되자 ‘인성이 물성과 다른 것은 기(氣)의 국(局)때문이며, 인리(人理)가 곧 물리(物理)인 것은 이(理)의 통(通)때문이다.’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을 들어 한원진의 상이론(相異論)에 동조하였다.

권상하가 죽은 후에 남당 한원진에게 졸업하였다. 그의 족손(族孫)인 심기택(沈琦澤)이 쓴 <묘지명>에는

‘강문(江門, 한수재 문하)의 만학으로 남당에게 졸업했으며 한수재를 섬기듯이 한원진을 섬겼다’

라고 한다. 남당 문하의 고족이자 심조의 문인을 자처한 김근행(金謹行, 1712-?)이 쓴 <정좌와선생행장(靜坐窩先生行狀)>에는

‘계축년(1733)에 남당 문하에 수개월을 머물면서 천인성명(天人性命)의 근원이나 왕패치란(王覇治亂) 근본에 대하여 논한 후에, 남당 선생은 금세에 둘도 없는 통유이시다. 내가 남당 선생에게 지극한 가르침을 받았다. 후에 거처하는 서실의 편액을 靜坐로 정하고 그 명문과 서액을 남당에게 요청하여 걸었다’

라고 적고 있다. 그의 자호인 정좌와는 바로 여기서 연유한다. 권상하의 만년 제자로 한원진에게 졸업했다는 심기택의 <묘지명>은 김근행의 <정좌와선생행장(靜坐窩先生行狀)>과 수미로 연결된다 할 것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자는 신부(信夫)이고 호는 정좌와(靜坐窩)이다. 선조 조 최초의 동서분당 때에 서인의 영수로 지목받은 심의겸의 동생 집안으로, 아버지는 심수정(沈壽鼎)이고 어머니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 도사(都事) 정전창(鄭展昌)의 딸이다.

오십을 넘긴 1747년에 조명리(趙明履, 1697-1756)가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추천하였는데, 한원진이 취임할 것을 적극 권유하여 힘써 나아가 맡은 소임을 다했다. 이어 가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오래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사직하고 학문연마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김근행이 <행장>에서

‘선생은 경세(經世)를 자부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백성을 보호하고 학문을 일으키는 것(保民興學)이 다스리는 큰 법도이며 삼대의 다스림에서 본받을 것은 심범(心法)이니 묵은 자취들을 본받을 것이 없다 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사문의 가르침을 받은 것인데 이런 것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으니 안타깝다’

라고 적고 있다.

만년에 김포에 우거하면서 중봉 조헌을 모신 우저서원(牛渚書院)에서 신미년(1751)부터 강학을 시작했다. 당시 우저서원에서는 강학을 하지 않았다. 원근의 학자들이 모여 들여 성황을 이루었고 사풍이 진작되었다. 교육 내용은 <소학>과 <가례>를 배운 후에 사서를 학습하였다.

김근행이 <행장>에서 ‘오늘날 선생의 면모를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선생의 편지글을 읽어 보아라’고 하였는데, <정좌와집>에 수록된 편지들은 한원진, 윤봉구, 이재 등과 주고받은 인물성동이론에 관한 논학서가 주종을 이룬다. 심조는 인물성동이론에서 호론의 입장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비록 인물성 이론으로 남당의 입장을 견지했지만, 한원진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던 이재와도 상당한 학문적 교유를 나누고 있었다. <묘지명>에 의하면, 심조의 현명함을 이재가 극찬했지만 남당 문화 제자들이 의심하지 않았는데 이는 심조의 공명정대한 심사를 잘 알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학술 변론이 점차 파당적 배타성을 갖게 되고, 이론적 변론에만 치우쳐 유학의 본질인 일상공부와 실천을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도 걱정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심조가 비록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가 남긴 글들은 인물성동이론을 비롯한 유학에 대한 심도 깊은 사색의 성과들이 즐비하다. 이는 여느 문학지사와는 구별되는 점이다. 한편 김근행은 <행장>에서 심조가 또한 산수를 무척 좋아했다고 적고 있다.

그의 문집에 <도봉행일기(道峯行日記)>가 있다. ‘갑술년 8월 27일’로 시작하는 이 산행기는 그가 죽인 두 해 전인 1754년의 도봉산 일람기를 적은 글이다. 우저서원에서 강을 마친 후에 심조가 제생들에게 도봉서원은 도학의 정신이 남아 있는 곳이고 그곳의 산수가 아름다우니 강학도 하고 산수를 유람하자고 제안하여, 9월 12일에 출발하여 17일에 돌아오는 5일간의 여정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여행의 전 과정을 사진으로 찍듯이 기록한 글들은 당시 도봉서원의 실제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임과 동시에 심조의 소슬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본래 도봉서원은 1573년(선조 6)에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부임한 남언경(南彦經)이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는 뜻으로 도봉 서원을 건립하고 이듬해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후 도봉 서원은 300여 년간 서울·경기 지역 선비들의 주요 교유처가 되었다. 특히 산수가 빼어나서 선비들이 즐겨 찾는 서원이었다.

문집으로 『정좌와집(靜坐窩集)』이 전한다. 특히 본 문집은 행장과 연보가 있어서 그의 삶과 사상의 내력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데 편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