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선(高光善,1855-1934)


 

고광선(高光善,1855-1934)                                  PDF Download

 

1855(철종 6)~1934. 근대의 학자이다.

관은 장택(長澤). 자는 원여(元汝), 호는 현와(弦窩)이다. 복헌(復軒) 고정헌(高廷憲)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고제열(高濟說)이다. 아버지는 호은(湖隱) 고박주(高璞柱)이며, 어머니는 행주 기씨(幸州奇氏) 기우진(奇禹鎭)의 딸이다.

1855(을묘)년 철종 6년 12월 23일에 광주 복촌(復村)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의 모습이 민첩하고 단정하였으며, 8세에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글 읽기를 잘하여 칭찬을 많이 받았다. 10세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곡하고 슬퍼하기를 어른처럼 하였다.

세 살짜리 동생을 보살피고 계모 광산 김씨를 친어머니처럼 섬기니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어려서 한 고향 사람인 덕암(德巖) 나도규(羅燾圭)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다. 그 후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도 출입하면서 천인성명(天人性命)의 깊은 뜻과 예법의 본질을 배웠다. 일용의 예절에서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부지런히 질문하여 깨우쳤으니, 이 때문에 기정진이 기특하게 여기고 더욱 성실하게 지도하였다. 성격은 온순하였으나 옳지 않은 것을 보면 용감하게 고쳤으므로 스승이 이를 장하게 여겼다. 부친상을 당하고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도 상례를 오로지 원칙대로 지켰으며, 음식을 절제하고 슬픔을 다하였다. 그와 교유한 인물로는 설진영(薛鎭永)을 들 수 있다.

학문에 전념하고 벼슬하지 않다가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숨어 지내면서 이듬해에 엄이재(掩耳齋)를 세웠다. ‘엄이’는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시끄러운 세상일에 대해 귀를 막고 살고자 했던 것으로, 스승인 나도규 역시 봉황산의 덕암에서 살았으므로 그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배우러 오는 학생들의 수를 감당하지 못하자, 문인들이 힘을 모아 1919년에 그 옆에 봉산정사(鳳山精舍)를 지어서 이곳에서 강학하였다. 고광선은 1918년 고종이 승하하자 엄이재의 북쪽 바위에서 통곡하였는데, 이를 읍궁암(泣弓巖)이라고 부른다. 그가 죽자 1936년에 그 곁에 영당을 지었고, 이를 바탕으로 1964년에는 봉산사를 세웠으며, 1975년에는 엄이재를 중건하였다. 「봉산사지(鳳山祠誌)」의 문인록에 올라 있는 고광선의 문인 수는 650명에 이른다.「봉산사지」는 1978년에 간행된 봉산사의 기록이다.

고광선이 경영했던 엄이제나 봉산정사는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 봉학마을의 봉황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주변에는 재봉산과 극락강, 송학산 등이 있으며, 마을과는 많이 떨어져 있어서 격리된 느낌을 받는다. 엄이재 현판은 현재 고직사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에 걸려 있는데, 이 현판에는 1916년 봄에 사촌인 고강은(高光殷)이 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왼쪽 뒤쪽에는 봉산정사가 세워져 있고, 엄이재 뒤쪽 오른편으로 고광선의 영당인 봉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엄이재 관련 시문으로는 주인 고광선의 기와 시, 동문인 송정묵의 기와 시, 그리고 김만식․정운오․윤경혁․양회갑․최윤환․나종우 등의 시가 각각 문집에 남아있다. 고광선의 「엄이재기」를 보면, 원래의 엄이재의 경관과 엄이재라는 이름의 의미 등을 알 수 있다. 봉산정사의 관련 시문으로는 고광선과 문인들인 이종택․양회갑․노종룡․빅병주․최윤환․여창현 등의 시가 각각 문집에 남아있다.

고광선의 학문세계에 대해서는 그의 문집량에 비해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편지글이나 잡저 등은 일상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이어서 특별한 것을 추출해내기가 힘들다. 그러나 실천적 의리정신을 강조한 내용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군자는 세상이 어지럽다고 해서 그 행동을 바꾸지 않고, 할 만할 때에 할 만한 것을 하는 사람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의리정신은 제자인 윤경혁(尹璟赫)이 쓴 「언행록(言行錄)」에 잘 나타나 있다. 「언행록」에 따르면,

“조정에서 녹을 먹는 자는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어진 뒤에는 의리상 마땅히 죽어야 하나 죽지 않는 것은 오히려 죄가 된다. 그 죄 됨을 알면 마땅히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추어서 바깥사람들과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물며 붓을 잡고 역사가의 일을 하는 사람임에랴”

라고 하여 나라의 녹을 먹은 공직자들뿐만 아니라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들의 처신을 특히 강조하였다.

1934년 80세에 이질에 걸려 현와정사에서 운명하였다. 이듬해인 1935년 1월 20일 정사의 남쪽 산록 사좌원(巳坐原)에 안장하였다. 저서로는 「현와유고(弦窩遺稿)」가 남아있다. 현와유고는 1956년 고광선의 문인들이 그를 흠모하여 간행한 것이다.

「현와유고」는 근대의 학자인 고광선의 시문집이다. 모두 16권 8책으로 석인본이다. 1962년 박하형(朴夏炯) 등 문인들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송재직(宋在直)의 서문과 권말에 박하형의 발문이 있다. 현재 장서각 도서와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 165수, 권2~3에는 서(書) 442편, 권4에는 잡저 107편, 권5에는 서(序) 99편, 권6~7에는 기(記) 283편, 권8에는 발(跋) 37편, 명(銘) 4편, 찬(贊) 5편, 사(辭) 5편, 혼서(婚書) 1편, 상량문 22편, 축문 11편, 제문 6편, 권9에 비(碑) 57편, 권10~11에는 묘갈명 109편, 권12에는 묘지명 5편, 묘표 52편, 권13∼15에 행장 103편, 권16에는 실적(實蹟) 26편, 전(傳) 14편, 부록으로 언행록(言行錄)․가장(家狀)․행장․묘갈명․묘지명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증시(贈詩)와 차운(次韻)한 것이 대다수이다. 성리설에 대한 견해를 표현한 것과 언행을 경계하는 교훈적인 시도 있다. 「차길시은성돈십영(次吉市隱聖敦十詠)」은 효(孝)․우(友)․목(睦)․노인(老人)․상(喪)․장(葬)․기구(飢口) 등 10수로 구성된 시로서, 길성돈의 우애와 청렴한 행위를 칭송하며 교훈으로 삼도록 권면한 것이다. 「무송정가인(撫松亭歌引)」은 오랑캐의 침입으로 세상의 도가 피폐해졌다는 중국의 고사에 빗대어, 일본의 침략과 그로 인한 유교적 기풍이 상실되고 있음을 개탄한 것이다. 그밖에 「여우과죽림사(與友過竹林寺)」 등의 기행시도 여러 수 있다.

서(書)의 「상노사기선생(上蘆沙奇先生)」은 스승인 기정진에게 보낸 편지로, 학문적 성취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지도를 바라는 글이다. 「상면암최선생(上勉菴崔先生)」은 1905년경 최익현(崔益鉉)에게 보낸 서신으로, 그의 학덕과 언행을 기리고 자신도 그와 뜻을 같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답노순오(答盧順五)」에서는 성리설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는데,

“「심경(心經)」의 「심학도(心學圖)」에는 본심(本心)이 왼쪽에 있고 양심(良心)은 오른쪽에 있다고 하는데, 양심은 곧 본심이므로 두 마음을 나누는 것은 반드시 정(靜)과 동(動)을 생각하기 때문이고, 같이 두는 것은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답이선경(答李宣景)」이나 「답하치구(答河致九)」 등에서도 경서나 사서(史書)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잡저도 서신이 대부분으로, 주로 자신의 제자나 친구에게 언행을 바르게 할 것을 바라는 교훈적 내용의 글이 많다. 서(序)는 문집과 계안(契案)의 서가 많다. 그 가운데 「소의계서(昭義契序)」는 기정진의 고제자인 나도규(羅燾圭)가 죽은 뒤 동문과 제자들이 그의 학행을 사모해 만든 계에 부친 글로서, 유가의 도리를 널리 밝히자고 하였다. 기․발문․비․묘갈명․행장 등을 통해 호남 유림의 동향을 엿볼 수 있고, 한말 기정진 문하생의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한계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