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형수(徐逈修, 1725-1779)-2


서형수(徐逈修, 1725-1779)-2                            PDF Download

 

서형수는 자는 사의(士毅), 호는 직재(直齋)이고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할아버지는 서종대(徐宗大)이고, 아버지는 현령 서명훈(徐命勳)이다. 이재(李縡)와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다. 김원행의 딸을 배필로 맞이했고, 대사성 서유망(徐有望)이 아들이다.

스승 이재는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다.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영조 연간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에서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했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세자우부빈객·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스승 김원행은 이재의 수제자로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되어 종조부 김창협(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이재(李縡)의 문인이고 조선 후기 집권 계층인 노론 가문의 후손으로 학통을 잇는 존재로서 조야(朝野)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학자였다. 당시 유수한 산림(山林)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다.

서형수는 1751년(영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척신(戚臣) 홍계희(洪啓禧) 등 요인들이 교유를 청해온 것을 거절하여 관계의 진출이 늦어졌다.

 

1771년 교리로서 척신의 자제가 대거 대과(大科)에 급제하는 폐단의 시정을 촉구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승지로서 국가 대훈자(大勳者)의 특전이 너무 지나침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였다. 그 해 벽파(僻派)를 탄핵하였다가 면직당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쫓겨났다.

 

1773년 승지로 재기용된 뒤 대사간·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776년(정조 즉위년) 공조참의에 이르러 홍인한(洪麟漢)·이득신(李得臣) 일파의 전횡을 바로잡을 것을 계속 주장하였고, 그 뒤 대사간·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서형수의 딸인 영수합(令壽閤) 서씨는 조선 후기의 여성시인으로서 학문이 뛰어나고 겸손한 인품에 승지 홍인모(洪仁謨)에게 출가하여 자식들까지 훌륭하게 키웠다.

 

조모가 “여자가 글을 잘하면 명이 짧다.”고 하여 글을 배우지 못하게 하여 형제들 곁에서 외우는 것을 듣고 깨우쳐 경적(經籍)을 널리 섭렵하였다. 출가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홍석주(洪奭周), 홍길주(洪吉周), 홍현주(洪顯周), 유한당(幽閑堂) 홍원주(洪原周) 모두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들이었다. 문집으로 ⌈영수합고(令壽閤稿)⌋가 있다.

 

영수합고(令壽閤稿)는 1권으로 된 목활자본이다. 서씨의 남편 홍인모(洪仁謨)의 유고집인 『족수당집(足睡堂集)』 6권에 부록으로 편록 되었다. 영수합 서씨가 죽은 이듬해 아들들이 편찬하여 간행하였다. 1824년(순조 24)에 쓴 홍길주(洪吉周)의 발문과 홍현주(洪顯周)의 후기가 있다.

 

오언과 칠언의 절구 및 율시가 192수 실려 있으며, 1813년에 쓴 홍석주(洪奭周)의 묘표와 정경부인행장(貞敬夫人行狀)이 있다.

“선비성정은 똑바르다[先妣性情正].”

고 아들들이 평하였던 바와 같이 수록작품은 대체로 규범적이요, 윤리·도덕적인 내용을 많이 썼고, 중국문장가들의 시문을 차운한 것이 많다.

 

맨 처음 실린 「기장아부연행중(寄長兒赴燕行中)」에는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주요작품으로 「차이백추하형문(次李白秋下荊門)」과 「차당인방은자불우(次唐人訪隱者不遇)」·「차귀거래사(次歸去來辭)」 등이 있는데, 대부분 당시(唐詩)에 차운한 것이다.

 

<참고문헌>

국영조선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