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崔愼, 1642-1708)


최신(崔愼, 1642-1708)                                           PDF Download

 

신(崔愼, 1642-1708)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송시열에게서 배웠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제릉(齊陵) 참봉(參奉), 사옹원(司饔院) 봉사(奉事), 회인현감 등을 역임했으며,  북도지방 사람들로 부터 널리 추앙을 받고 그곳에 유풍을 세우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윤증(尹拯)이 송시열과 갈라서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송시열을 변호하고 그가 스승을 배신한 것에 대해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소론의 배척과 탄압을 받았다.  스승 송시열의 일로 유배형을 당했다가 , 유배지에서 풀려나온 뒤에 는스승의 묘소 근처인  광주(廣州) 에 집을 짓고 은거하기도 하였다.

1642년(1세, 인조20년) 음력 5월 13일에 함경북도 회령(會寧)에서 최산후(崔山厚)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회령(會寧), 자는 자경(子敬), 호는 학암(鶴菴)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5살(1646년) 때 모친상을 당했다.

1657년(16세,효종8년) ⌈맹자⌋를 읽고 학문에 뜻을 두었다.

1661년(20세,현종2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상례를 성실히 실천한 것이 조정에 알려져 복호(復戶,요역 부담의 감면)를 받았다.

1665년(24세,현종6년) 10월,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한 민정중(閔鼎重)을 따라 칠보산(七寶山)을 유람하였다.  함경도 함산(咸山)에서 ⌈심경(心經)⌋을 배웠다.  전년에는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가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하자 방문하여 인사를 한 적이 있었다.

1666년(25세,현종7년) 3월, 민정중(閔鼎重)의 소개로 회덕(懷德, 지금의 대전광역시)의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인사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스승의 격려를 받으며 근사록(近思錄), 역학계몽(易學啓蒙), 가례(家禮), 상수(象數), 율려(律呂) 등 성리학(性理學) 관련지식을 배우며 연구하였다.
당시 그가 송시열의 문하에서 글 공부하던 상황은 그의 문집에 이렇게 실려있다.( ⌈학암집⌋ 제2권 華陽聞見錄)

“내가 화양동(華陽洞)에서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던 때의 일이다.  매일 아침  맑은 첫새벽에, 선생님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맹자⌋ 몇 편과 ⌈상서⌋ 의 전모(典․謨), ⌈용학정문(庸學正文), 그리고 주자의 문장 중긴 것 한 두편을 읽었다.  이것은 선생님이 일생동안 해온 공부로 상례가 있거나 병에 들어 부득이 한때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는일과 였다.  선생님은 항상 제자들에게 ‘자네들은 평상시에 읽는 책은 없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독서라 는것은 반드시 평소에 일상적으로 해야한다, 그래야 쓸모가 있다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길 삼사백번을 읽지 않으면 문장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도 하셨다.”

1674년(33세,현종15년) 이단하(李端夏)가 현종(顯宗)의 행장을 지으면서 스승 송시열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최신은 이단하에게 편지를 보내 스승을 저버린 죄를 꾸짖었다.

1675년(34세,숙종1년) 1월 13일 숙종이 왕세자 책봉에반 대하는 송시열을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유배보냈다.  당시 충청도 진천 길상사에 있던 송시열은 유배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우명(金佑明)의 계획이 지금에야 실현된 것이다.  지금까지 지체된 것은 임금의 참의심이 많으신 것이다.”

라고말했다.( ⌈최신록⌋)

이때 유필명(柳弼明)이 상소문을 올려 송시열의 유배를 반대하였는데 그 상소문을 최신이 지어 주었다고 의심을 받아 심문을 받고 사천(泗川)에 유배되었다.  이해 6월에 송시열은 남인파 관료들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다시 경상도 장기(長鬐)로 이배(移配, 유배지를 옮김) 되었다.  이후 덕원, 웅천(熊川), 장기(長鬐), 거제(巨濟, 1679년4월), 청풍(淸風, 1680년5월) 등지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1680년(39세,숙종6세) 경신환국으로 스승 송시열이 풀려나왔다. 남인이 권력을 잃고, 다시 서인이 득세하였다.  최신도 유배지에서 풀려나 곧바로 제릉(齊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1681년(40세,숙종7년) 봄에 준원전(濬源殿) 참봉으로 임명되었다. 가을에,  고향인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돌아갔다.

1682년(41세,숙종8년) 1월에 상소문을 올려 당시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8월에, 사직서(社稷署) 참봉에 임명되었다.  다시 상소하여 송시열을 우대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이단하(李端夏)가 박태보(朴泰輔)에 게 배척 당한 일을 임금에게 알렸다.  임금이 기꺼이 그 내용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특별히 사옹원(司饔院) 봉사(奉事)에 임명하였다.  얼마뒤에 직장(直長)으로 승진하였다.

1684년(43세,숙종10년) 윤증(尹拯)이 송시열과 갈라서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송시열을 변호하고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것을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큰 논란이 일어나 소론측의 배척을 받았다.

1685년(44세,숙종11년) 광흥창(廣興倉)의 주부(主簿)가 되었다.  다음해 회인(懷仁)의 현감(縣監)이 되었다.  당시 재해를 입은 고을의 부역을 면제시키는 등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1688년(47세,숙종14년) 사람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결국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음해 기사환국으로 광양(光陽)에 유배되었다. 당시 스승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사망하자 제문(祭文)을 지어 올리고,  윤증이 스승을 죽인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1694년(53세,숙종20년)  갑술환국으로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스승  송시열의 묘소 근처인 광주(廣州)에 임시 숙소를 만들어 은거하였다.

1697년(56세,숙종23년) 이해에 기근을 당하여 부인 창령 성씨(昌寧成氏)가 사망하였다.  당시 가정형편이 몹시 궁핍하여 주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장례를 치러주었다.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도망가버렸다.

1701년(60세,숙종27년) 진도(珍島) 목장의 감목관(監牧官)이 되었다.  다음해 회갑을 맞이하여 가족들의 시에 화답하여 오언(五言)으로된 고풍시(古風詩) 230여 구를 지었다.

1708년(67세,숙종34년) 7월 6일에 스승  송시열의 묘가 있는 광주(廣州, 경기도) 임시 숙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함경도 출신의 사림으로 북도지방에서 널리 추앙을 받았다.  헌종 때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 되었다가 고종 때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그리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때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5대손 최경조(崔擎祖)가 문집의 간행을 위해서 유고를 정리하고,  묘표등 부록을 작성하였다.  이후 1882년경 조정이 최신을 기리는 추증을 내린 것을 계기로 문집 간행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1884년에 9대손 최병진(崔秉鎭)이 연활자로 6권 3책의 문집 ⌈학암집⌋을 간행하였다.  제1권 외의 글은 대개 송시열의 문중에서 저자와 관계된 기록을 얻어 수록한 것이다.  1684년에 올린 만언소(萬言)도 이 문집에 포함되어 있는데,  만언소는 최신이 쓴 문장 중 가장 대표적인 저작으로 송시열과 윤증(尹拯)의 갈등을 표면화 시킨 것으로 노론과 소론의 분당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상소문이다.

<참고자료>
『학암집(鶴菴集)』
차용걸, ⌈최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신행력⌋, 한국문집총간인물연표, 한국의지식콘텐츠(http://www.krp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