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만(奇宇萬,1846-1916)


 

기우만(奇宇萬,1846-1916)                                  PDF Download

 

1846(헌종 12)∼1916.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이다.

관은 행주(幸州)로 지금의 경기도 고양이다.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이며 또는 학정거사(學靜居士)라고도 부른다. 1846년 전라도 장성 탁곡(卓谷)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며, 아버지는 기만연(奇晩衍), 어머니는 이기성(李耆成)의 딸이다. 기씨가 장성에 들어와 산 것은 중종 연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이다. 기묘 사림의 한 사람이었던 기준(奇遵)의 둘째 형인 기원(奇遠)이 기묘사화를 피해 장성으로 옮겨 온 이후에 대대로 살았다.

기우만은 8세 때 할아버지인 기정진을 모시고 하사(下沙)로 이사했고, 이후 기정진이 죽을 때까지 줄곧 옆에서 모셨다. 기정진의 강학활동을 보좌하면서 집안일까지 챙겼다. 34세 때 기정진이 죽자 호남의 유림들은 기우만을 종장으로 추대했고 기우만을 기정진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기우만은 조선의 개국에서부터 격변기에 살면서 할아버지 기정진의 위정척사 사상을 현실대응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각 읍에 통고하여 규탄하기를 촉구했고, 1896년에는 51세의 나이로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가자 ‘호랑이를 풀어서 보호하고자 하는 꼴’이라면서 외세에 의탁하는 일이 위험하다고 경고했고, ‘종묘사직에 제사도 지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조선의 멸망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기도 하였다. 의병을 일으켜 나주와 광주로 갔으나 신기선(申箕善)이 선유사로 내려왔으므로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은 빈자리에 앉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허공에서 이루어질 수 없고 오직 땅 위에서만 이루어지는데 그 땅이 견양(犬羊)의 차지가 되었다’고 분노했다. 을사 5적에 대해 ‘이 무리들은 선왕으로부터 받은 강토를 사사롭게 적에게 넘긴 자들’이라고 규정하고 처단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6년 호남 사람들을 곡성에 모이게 하고 을사 5적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추진하였다. 이후 을사 5적을 암살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아 일본 경찰에 잡혀가 광주, 영광, 서울 등의 감옥에 갇혀 심문을 받았다.

1910년에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서는 나라가 망한 신하는 편안하게 있을 수 없다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해진 옷으로 바꿔 입고 죽림 속에 칩거하였다. 1911년 일본인들이 각 지역의 명망 있는 유림들에게 은사금을 주었는데, 단호하게 거절하여 일본의 침략 야욕에 항거하는 뜻을 보였다. 기우만은 조선의 신하로 살기를 맹세했고 그것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 후 방장산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1916년 남원의 사촌에서 별세하였다.

기우만은 인생 후반기에 외세를 배격하고 적극적인 항일활동을 하였다. 개화기 기간 동안 호남의 의병들은 두 차례에 걸쳐 크게 일어났다. 을미의병은 친일개화당 정권에 대한 비판이었고, 병신년 의병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 친일 매국세력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 두 번의 의병활동에서 기우만이 지도자 역할을 하였으므로 그의 의병활동은 반개화, 반침략적 투쟁이며 조선 왕권과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근왕(勤王)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호남 의병활동에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기우만은 조선이 중화(中華)의 맥을 이었다고 하여 조선의 문화, 제도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사상, 문물에 대해서는 삿된 것, 오랑캐의 것으로 규정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서양의 책을 사서 읽고 천주교가 성행한다는 말을 듣고는 ‘신주(神州)가 무너져 없어진 이후로 한 줄기의 화맥(華脈)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동쪽의 중화가 된지 3백년인데 지금 모두 없어졌다’라고 한탄하였다. 화이(華夷)구분과 소중화 의식은 위정척사 운동의 이념적 기반이었다. 소중화 자부심은 갑오개혁 개화에 대한 비판 정신의 뿌리였다.

당시 개화파들은 조선의 전통을 구시대적인 폐습으로 간주하여 개혁할 대상으로 여겼다. 서양의 사상, 문화, 문물을 개화 기준으로 하여 정치부터 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서양식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우만은 서양과 일본을 오랑캐로 보았고 그들의 문화, 문물을 오랑캐의 것으로 간주하였으므로 개화파의 개화란 중화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중화를 변질시켜 오랑캐로 만드는 일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정(正)-바름’이 아니라 ‘사(邪)-거짓’된 개화로 개화라는 이름만 훔쳐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는 일로 규정하였다. 삿되고 거짓스런 상황을 바름으로 돌리기 위해 도학의 맥을 강조하며 윤리도덕의 회복에 힘썼다.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석채(釋菜)와 향음주례를 실시하기도 했다.

기우만이 주장한 부정척사(扶正斥邪)는 기정진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바른 학문을 잡게 되면 거짓된 것들은 저절로 없어지게 되는데, 거짓이 세상에 번성한 것은 정학(正學)의 도가 밝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상에서 향음주례나 석채 등을 통해 윤리 도덕적 기강을 회복하고 성현의 도맥을 재확인하고자 하였다. 이는 곧 중화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 문화야 말로 올바르고 개화된 것이며 정학이 아직 건재함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학문적인 측면에 있어서 기우만은 호남 유림의 종장이라는 위치에 있었으나 따로 학설을 세우지 않았다. 스승인 기정진이 할아버지였으므로 집안 어른의 학설에 대해 부가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덧보태는 일이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정진의 강학활동을 돕느라 제대로 배우는 일도 어려웠다. 기정진이 제자들에게 강학하는 내용을 곁에서 듣고 사색하여 학설을 터득했을 뿐이고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거나 스승과 토론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승의 학설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었고 다른 학파와의 학문적 토론은 기정진 제자들에게 일임하였다. 또한 기정진의 제자나 친우들이 질문한 내용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답변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성리학과 관련한 전문 저술이 없다. 평소 유교 윤리를 강조했던 만큼 삼강(三綱)에 가까운 행실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드러내었는데 호남의사열전(湖南義士列傳)도 그런 의도에서 저술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송사집과 송사선생문집습유가 있다. 정재규(鄭載圭)․조성가(趙性家)․정의림(鄭義林) 등과 교유하였으며,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송사선생문집⌋은 조선 말기 학자이며 의병장인 기우만의 문집이다. 문인인 양회갑(梁會甲)의 주도로 편찬하여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1930년에 착수되어 1931년에 간행되었다. 현재 규장각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집은 목록(目錄) 2권, 원집(原集) 50권, 속(續) 2권 합 26책으로서, 목록의 뒤에 정오표(正誤表)가 수록되어 있고, 서문이나 발문은 없으며, 묘도문(墓道文)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권1에는 시(詩) 192제, 권2에는 소(疏) 5편, 권3~10에는 서(書) 1,025편, 권11~12에는 잡저 176편, 권13~16에는 서(序) 285편, 권17~21에는 기(記) 420편, 권22에는 발(跋) 116편, 권24에는 신도비문(神道碑銘) 16편, 권25에는 비(碑) 51편, 권26~38에는 묘갈명(墓碣銘) 583편, 권41~43에는 묘표(墓表) 162편, 권44~48에는 행장(行狀) 104편, 권49에는 유사(遺事) 34편, 권50에는 전(傳) 36편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