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응구(申應榘, 1553-1623)


신응구(申應榘, 1553-1623)                                PDF Download

 

혼과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특히 성혼을 위한 신원에 적극적이었다. 김상헌이 신응구 묘갈명에서

“성 문간공(成文簡公)이 가문에 전래된 정대한 학문으로 우계(牛溪) 위에서 학도들을 가르쳐 성취한 제자들을 쉽게 다 셀 수 없었는데, 공자(孔子)가 이른 것처럼 문인이 더 친근해졌다는 것에 접근한 자에 있어서는 고령(高靈) 신공(申公)이 가장 선배라고 하겠다.”

라는 평가는 여실하다.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자방(子方)이고 호는 만퇴헌(晩退軒)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벌(橃)이며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의형(義衡)의 딸이다.

1580년(선조 13) 천거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582년에 사마시에 합격,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천거로 장원(掌苑)이 되었다. 1597년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다시 관계에 들어가 형조정랑, 한성부서윤, 이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1602년 무고를 당하자 사직하였다가 다시 충주목사, 삭녕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공조참의가 되었고 그 뒤 양주목사를 역임하고,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을 주장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충청도 남포(藍浦)로 낙향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인조반정 후에 형조참의·동부승지·좌부승지 등을 거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춘천부사를 역임하였다.

<국조인물고>에 실린 신응구의 묘갈명은 김상헌이 만년에 쓴 내용인데, 글 중에

“나는 공과 더불어 어렸을 때부터 장년에 이를 때까지 같은 마을에 살면서 일찍부터 기풍을 사모하였는데, 3대 동안 서로 주선하며 백여 년을 지내왔으므로 공이 나를 알아준 것이 기쁠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스스로 공을 안다고 여기었다.”

라는 대목을 보건대, 신응구를 잘 알려주는 글로 사료된다. <인조실록>에 실린 신응구의 <졸기>가 폄하의 뜻이 비취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김상헌은 명문에서 신응구의 삶을 이렇게 적고 있다.

공의 모습을 바라보니, 한 겨울의 눈 속에 늠름한 송백(松栢)처럼 우뚝 서 있었고 공의 중심을 살펴보면 이치가 분명하고 의리에 합치되어 얼음이 녹듯이 화평했도다. 약관(弱冠)에 향양(向陽)의 마을에 찾아가 배워 스승과 제자가 되었으니, 70명의 제자가 공자(孔子)를 따른 것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 세상에 어려움을 만나 조금만 시험해 보고 항상 곤궁하게 살았도다. 하늘에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결국 창생의 한을 남기었도다. 아! 매우 슬프도다!

이치가 분명하고 의리에 합치되었다는 것은, 앞서 최유원(崔有源) 등이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이 반역을 꾀하였다고 고변하였지만 실상이 매우 모호하였기 때문에 공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끌어넣어 후일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신응구를 빙자하여 말하고 공신록(功臣錄)에 기록하였다. 이는 신응구가 전에 두 번이나 광해군의 사부를 역임한 적이 있었음도 고려한 조치였다. 신응구가 이를 부끄럽게 여겨 누차 상소를 올려 자신의 이름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가 아들에게 유서(遺書)를 써서 주었는데, 그 유서에 ‘내가 죽은 뒤에 공신록에 나의 이름이 그대로 있을 경우에는, 장사를 치를 적에 곧바로 담당자에게 반드시 사양의 의사를 관철시켜 나의 뜻을 밝히도록 하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나로 하여금 지하에서 거듭 죄를 짓게 할 것이다.’는 대목에서 여실히 보인다.

한 겨울 눈 속에 늠름한 송백(松栢)처럼 우뚝 서 있었다는 그 기상은, 김상헌이

“공이 젊어서부터 중대한 명망을 지니어 자신감이 적지 않았다. 대체로 공의 재주와 견식이 과감하고 민첩하여 고상한 의논이 종횡으로 넘쳐흘렀으므로 필시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고 공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매우 뚜렷한 견해가 있다고 여기었으므로 세상에 행세할 적에 꺼리는 자와 인정하는 자가 얽히어 평소 쌓은 바를 펼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한 사람들이 너나없이 매우 애석해 하였다.”

라는 대목에서 밝히고 있으며, 글의 말미에 “아 슬프도다.”라고 왜 했는지도 대략을 가늠할 수 있겠다.

저서로는 『만퇴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