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립(李廷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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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립(李廷立, 1556년∼1595년)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 동부승지, 형조 참의, 인천 부사, 한성부 좌윤, 대사성 등을 지냈다. 이덕형과 이이첨의 일족이며, 과거 합격 동기인 이덕형, 이항복과 함께 경연에서 임금에게 통사강목을 강의하여 ‘3학사’의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최립(崔岦), 박순(朴淳),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기축옥사 때에는 사건을 처리하는데 공을 세우고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임금을 호위하는데 참여하였으며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보존하는데 큰 공을 세워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다.

1556년(1세)
명종 11년에 판결사(判決事) 이시무(李時茂)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정립의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좌랑 이수겸(李守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찰방(察訪, 역에서 근무하는 관리)을 지냈던 이이건(李以乾)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 의원군(義原君) 이억(李億)의 딸이다.

1566년(11세)
최립(崔岦)에게 한서(漢書)를 배웠다.

1569년(14세)
박순(朴淳)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문공부를 하였다.

1576년(21세)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다.

1580년(25세)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 예조 좌랑, 정언, 병조 좌랑,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문과 별시에 을과 1위로 급제한 사람이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었는데 이덕형은 친척으로 집안 동생이었다. 이덕형은 나중에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백사 이항복도 이때 문과에 급제하여 과거 합격 동기가 되었다.

1581년(26세)
선능(宣陵)의 제관(祭官)에 임명되었다.

1582년(27세)
6월, 수찬의 직위에 있었을 때, 대제학이었던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오억령(吳億齡) 등과 함께 임금의 <통감강목(通鑑綱目)> 강독을 맡게 되었다. 이정립은 이때부터 이덕형, 이항복과 함께 삼학사(三學士)로 주위의 칭송을 받게 되었다. 이즈음 사관(史官)이 되고, 예조좌랑, 정언에 임명되었다. 또 율곡의 추천을 받아 이항복, 이덕형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이 되어 호당(湖堂)에 들어가 독서에 전념하였다.

1583년(28세)
이조 좌랑, 경상우도 점마관(點馬官) 등에 임명되었다.

1584년(29세)
호남 규황어사(救荒御史)에 임명되었다.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상황을 조사하여 보고하고 조치하였다. 이후 복귀하여 병조 좌랑이 되었다.

1585년(30세)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1587년(32세)
경상도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금산 군수(金山郡守) 김협, 풍기 군수(豊基郡守) 김대명(金大鳴)은 불법 문서(不法文書)를 포착하여 파직시켰고, 개령 현감(開寧縣監) 박무(朴懋)는 탐욕이 많고 백성을 학대했기 때문에 파직하였다. 3월 2일(음력) 서울로 돌아와 임금에게 보고하니 선조는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적과 맞서 응변할 적에는 마땅히 적의 용병(用兵)하는 형세를 잘 알아 대응해야 한다. 적(왜군)은 이미 손죽도(損竹島)에서 승리하고 또 선산도(仙山島)에서 약탈하였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타고 바로 변경의 성을 침범하기는 그 형세가 매우 용이하다. 그런데도 바깥 바다에 계속 체류하고 여러 섬에 나누어 정박하면서 오래도록 쳐들어오지 않아 그 실정을 측량하기가 어려우니, 이를 참작하여 아뢸 것을 비변사에 이르라. 그리고 계속적으로 정병(精兵)을 보내 주고 적을 방어할 모든 기구들이 이미 정리되어 있는지의 여부도 병조에 이르라.”
이에 이정립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지금의 왜변(倭變, 왜군들의 변고)은 우연히 변경을 침범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전선(戰船)을 넉넉히 준비하여 대거 침입했습니다. 고풍손(高風孫)이 전한 대로 사을화동(沙乙火同)의 소행이란 것이 이미 빈 말이 아닙니다. 한 번 교전하고서 선박을 불태우고 장수를 죽였으니 곧바로 침범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날을 지체하면서 진격도 후퇴도 않기 때문에 그 실정을 가늠하지 못할 듯 하지만 어찌 심원(深遠)하여 알기 어려운 계책이야 있겠습니까. 전선을 나누어 정박시켜 의심스럽게 만들어서 우리 측이 한 곳에 병력을 집중토록 한 다음 가만히 다른 변경을 치려는 것이 하나요, 먼 곳에 있는 섬으로 물러나 숨었다가 우리가 원병을 계속 보내는 것을 기다려 일시에 거사하며 멀리 떨어진 변경에 출몰하면서 진보(鎭堡)의 형세를 살펴 허술한 틈을 타 갑자기 공격하려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적과 대응하는 곳은 방어가 그다지 허술하지는 않은데 본도(本道)에서 우려할 만한 곳은 가리포(加里浦)ㆍ진도(珍島)ㆍ제주(濟州) 등 3읍과 법성창(法聖倉)ㆍ군산창(群山倉)입니다. 그러나 본도의 방책(方策)에 진작 정해진 규칙이 있으니, 반드시 이미 조치하였을 것입니다. 정병은 현재 당상(堂上)ㆍ당하(堂下)의 무신(武臣)과 녹명인(錄名人) 및 잡류(雜類)ㆍ공ㆍ사천(公私賤)으로 활쏘기에 능한 사람을 벌써 선발해서 대오를 나누고 짐을 꾸려 명을 기다리게 하였으며, 궁시(弓矢)와 총통(銃筒)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부족한 것은 철갑(鐵甲)과 철환(鐵丸)이나 현재 만들고 있습니다.”
임금은 이에 알았다고 답하였다.

1589년(34세)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에 사간(司諫)자격으로 활동하였다.

1590년(35세)
장령이 되었으며, 여름에 기축옥사를 처리한 공으로 공신(平難功臣, 평난공신)이 되었다.

1591년(36세)
집의, 직제학, 동부승지, 형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인천 부사(府使)로 나가 부모를 봉양하였다.

1592년(37세)
4월 13일(음력, 양력으로는 5월 23일), 왜란이 발생하였다. 700여척의 함선에 2여명의 왜군들이 부산진으로 밀려들어왔다. 이윽고 그 숫자는 5만이 되었고, 나중에는 20만 대군으로 불어났다. 이정립은 예조참의로 왕을 호위하는데 참여하여 개성까지 갔다. 임금의 행차가 개성을 지나 황해도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종묘와 사직의 위패(廟社主)’가 개성에 남아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선조가 크게 놀라 즉시 모셔 오라고 명하였다. 개성에는 이미 적군이 들어와 있어서 위험하였으나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에 들어가 종묘사직의 위판을 모시고 나와 일행이 있는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중전(中殿)과 동궁(東宮, 왕세자)을 모시고 곡산(谷山)으로 갔다. 이즈음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나있었다.

1594년(39세)
한성부 우윤, 좌윤, 승문원 제조 등에 임명되었다. 이즈음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부임하였다. 12월에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다.

1595년(40세)
병으로 사직하였다. 4월, 명나라 사신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었으나 부임을 지체한 죄로 비판을 받았다. 이해 가을, 휴가를 얻어 장인을 이장하였다. 이 직후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유족으로 부인 전의(全義)이씨(승지 이순인李純仁의 딸)가 있으며 세 아들이 있다. 광주(廣州) 구천리 선영에 장사를 지냈다. 1601년에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현종 11년인 1670년에 ‘문희(文僖)’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계은집』이 있다. 「계은집에 대한 서(敍)」가 이항복의 백사집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자정(子政) 이정립(李廷立)이 작고한 지 벌써 23년이 되었다. 그 동안에 두 번이나 병화(兵火)를 겪었는데도 그의 유문(遺文)이 점차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국가의 모든 중요한 전적들도 잿더미가 되어 버렸는데, 유독 이 글만은 없어지지 않았으니, 비유하자면 진시황(秦始皇)이 천하의 서적들을 불태우고 난 뒤에 공자의 구택(舊宅) 벽 속에서 고문상서(古文尙書)가 나온 것과 같다.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한 번 보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다. 일찍이 듣건대, 정이(程頤)의 말에, “사람들은 말을 글로 아름답게 꾸미고자 한다. 글로 꾸며 놓으면 사랑스럽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전해지는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이 틀림없구나.
하루는 그의 아들 이진담(李眞聃)이 와서 나에게 그 유문을 보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와 오랫동안 종유하시고 또 서로 잘 아는 분으로는 의당 장인(丈人)만한 분이 없으니, 저를 위하여 문집을 간행하게 해 주시고, 또 한 마디 말을 첫머리에 얹어서 후세에 빛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마침내 받아서 읽어 보니, 그가 언론(言論)을 세운 것이나 문사(文辭)를 발한 것이 모두 우리 친구들 사이에 서로 술을 마시며 흥겹게 읊조린 유적(遺迹)들이다. 그런데 그 때의 사람과 일이 전혀 남아 있는 것이 없건만, 오직 나 한 사람만이 외로이 홀로 남아 있어, 마치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백 번 바뀌어도 노선(老仙, 이정립을 의미함)은 죽지 않고 웃으며 금적(金狄, 금으로 만든 동상)을 어루만지면서 오랜 세월을 상기하여 감탄을 일으킨 일과 같으니,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정(이정립)이 물건(物)은 좋아하는 것이 없어, 성색(聲色)ㆍ완호(玩好)와 생산 작업에 대해서는 마치 어린애와 같다. 그러나 유독 서책은 기욕(嗜欲, 즐기고 좋아하는 것)처럼 즐기어, 날마다 자시(子時) 이후에는 반드시 일어나 의복을 정제하고 글을 송독(誦讀)하면서 날이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평생에 저술한 글이 매우 많았으므로,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옛 사람 중에 글을 많이 저술한 이도 나와 같이 많은 사람은 없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대체로 백분의 일에 불과하니, 다만 대롱 구멍으로 표범의 무늬 하나를 보는 셈일 뿐이다. 아!

<참고자료>
선조실록 선조 20년 3월 2일 기사
이항복, 백사집 제2권 서(敍), <한국고전종합DB, 고전번역서>
「이정립 행력」,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인물연표, <한국의 지식콘텐츠>
이재범, 「이정립(李廷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