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욱(金炳昱)1808∼1885


김병욱(金炳昱)                                                             PDF Download

 

1808(순조 8)∼1885(고종 22). 조선 말기의 문신.

관은 안동(安東). 자는 문거(文擧), 호는 뇌서(磊棲)로 경상도 문경 출생이다.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김석근(金襫根)이며, 어머니는 문희전씨(聞喜錢氏)로 전도석(錢道碩)의 딸이다. 또한 일제 시대 극작가와 연극이론가로 유명했던 김우진(金祐鎭, 1897~1926)의 조부이다.

7세부터 수학하기 시작하였으며, 10세가 넘어서는 민조영(閔祖榮)에게 나아가 성명(性命)의 학문을 배웠다. 18세가 되자 보다 많은 사우들과 교유하고 학문을 넓히고자 하여 부친에게 허락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었던 김희순(金羲淳)과 김수근(金洙根)두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김수근의 아들이며 후일 국권을 흔들었던 김병학(金炳學)·김병국(金炳國)과 교유하였다. 김수근은 김병욱의 학문과 사상 형성과정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친 스승이었는데, 김수근의 문하에 공부하면서 국가적인 중요한 문제점들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그의 해결방안에 대해 깊이 고민하였다. 김수근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였으니,

“내가 평생 다른 사람과 합치되는 것이 적어 도처어서 미움을 받았는데 오직 溪山(김수근)선생만이 나를 깊이 알아 매양 허락해주셨다”

라고 할 정도였다. 김수근으로부터 수업받은 내용을 살펴보면, 심성론적인 논변보다는 환곡이나 재정확보책 등 현실문제와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현실문제에 대한 김수근의 깊은 관심은 북학풍의 가학(家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858년(철종 9) 궁중의 경사로 6품 벼슬에 등용되어 1860년에 사헌부감찰과 장악원주부를 거쳐, 1862년에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소문난 연풍(延豊)의 현감으로 임명되어 큰 치적을 남기며 숙폐(宿弊 : 오랜 동안 쌓인 폐해)를 일소하였다.

새로 부임한 감사와의 알력으로 사직하고 돌아오자 현에서 동비(銅碑)를 세워 덕을 기렸다. 1867년(고종 4) 문경현(聞慶縣)의 숙폐를 다스리다 토호로 몰려 황해도 문화현(文化縣)로 귀양갔다. 하지만 어려운 시국을 풀어나갈 방도에 대해 깊이 고민하였고, 그러한 고민의 성과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상소하는 등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삶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이때 귀양지에서 「태평오책(太平五策)」을 올렸는데, 고종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들었고 귀양도 곧 풀렸다.

1882년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다. 항상 지(知)·인(仁)·용(勇) 중에서 ‘용’이 학문의 관건임을 들어 자신이나 후진을 채찍질하였고, 삼정(三政)에 대한 그의 해박한 식견은 고금을 통틀어 막히는 데가 없었으며, 늘 개혁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창고가 비어있고 의식(衣食)이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예의와 염치를 돌보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도덕과 문학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조선 지식인들의 학문태도를 비판하였다. 조선의 문학과 명절(名節)은 중국과 비교해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지만 국가를 경영하고 민생을 제정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노성(老成)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고 신진들은 청담(淸談)만을 고상히 여길 뿐 세상의 일에는 전혀 어두워 삼정(三政)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설령 경제정책을 품은 사람이 등용된다고 해도 조정의 의론이 각각 다르고 조치가 일정하지 않아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현실이 민생파탄의 원인이라고 파악하였다.

이처럼 명절과 문학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민생이 제정된 후에야 배양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대의(大義)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일의 변화에 대비하지 못하면 일의 성패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이는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의 역사적 경험에서 알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척사(斥邪)의 요체는 오도(吾道)를 밝히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선왕의 도를 강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학하는 선비를 구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저서로는 「뇌서집」이 있다.

뇌서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김병욱의 시문집. 6권 2책. 필사본.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하여 여러 공공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07년 김병욱의 아들 김성규(金星圭)와 장손 김호진(金灝鎭) 등이 편집·필사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김성규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시 434수, 권3에 서(書) 31편, 소 5편, 서(序) 3편, 기 3편, 발 제2편, 권4에 제문 9편, 가장(家狀) 1편, 논설 18편, 전(傳) 1편, 표 3편, 권5에 잡저 8편, 권6에 잡저 5편, 공문(公文) 19편, 부록으로 가장 1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밖에 이 책을 정초(正草)하기 전 초록한 시고(詩稿)가 주필(朱筆)의 흔적이 선연하게 권말에 함께 묶여 있다.

서(書)에는 당시 국권을 잡고 있던 김병국(金炳國)·김병학(金炳學)과 국정에 대해 주고받은 편지와 민태호(閔台鎬)·민규호(閔奎鎬) 및 흥선대원군에게 보낸 편지도 있어, 당시 그의 활약상과 교유가 범상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 내용들도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회복시킬 삼정(三政)에 대한 고언(苦言)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삼정에 대한 견해는 「정축재소(丁丑再疏)」·「유곡역취모의(留穀亦取耗議)」·「논적정(論糴政)」·「논군정징색지폐(論軍丁徵索之弊)」·「사창절목(社倉節目)」 등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는 환자[還上]를 빌미로 국민을 수탈하는 갖가지 명목의 세금들을 열거하고, 환자를 정부에서 취급하지 말고 마을별로 관장하면서 모조(耗租: 환자를 받을 때, 곡식을 쌓아둔 동안에 축이 날 것을 예측해 한 섬에 몇 되씩 덧붙여 받던 곡식)만을 정부가 거두어들일 것을 제시하였다.

또한, 군대의 위영제도(衛營制度)의 문란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여러 가지 혁신책들을 제시하면서, 정부의 집정자들에게 이러한 여러 역사적인 고찰과 그의 경략은 성인이 다시 난다고 하여도 내 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에 찬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가장에는 그의 이런 견해를 집합한 「태평오책(太平五策)」이라는 역저가 있어 고종에게 많은 칭찬을 들었으나 불타고 없어졌다고 하였다.

「복사소견(鵩舍消遣)」은 그가 고향 문경에서 폐단을 일소하려다 토호(土豪)로 몰려 문화(文化)에 귀양가서 당시 삼정의 문란, 관리들의 수탈, 토호의 폐단, 당시 정객들의 인물평을 80여 조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것으로,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는 자료가 될 것이다.
「문경현구폐전말(聞慶縣捄弊顚末)」은 그가 문경의 유지들과 폐정을 척결한 전말을 적은 것이고, 임오군란의 시발을 분석한 「국변기략(國變紀略)」,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에서 일본의 침략을 예시한 「인항설(仁港說)」, 압록강 연안의 무창(茂昌)·여연(閭延)·우예(虞芮)·자성(慈城)을 군(郡)으로 승격해 변방의 경계를 튼튼히 할 것을 주장한 「복사군의(復四郡議)」가 있다. 「수불론(讎佛論)」도 그의 역저 가운데 하나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순종실록(純宗實錄)」, 「뇌서집(磊棲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