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하기를 좋아하고 웃기는 얘기로 시끄러울 때


농담하기를 좋아하고 웃기는 얘기로 시끄러울 때

인기 있는 사람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할 때 어떤 사람이 인기가 있을까? 또 아이들 사이에서도 어떤 아이가 인기가 있을까? 답은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시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몇 십 년 전만해도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고 잘 생기고 게다가 마음씨가 착한 학생이 인기가 좋았다. 사회에서도 잘 생기고 능력 있고 집안 배경이 좋은 사람들이 대체로 인기가 있었다. 게다가 인간성까지 좋으면 금상첨화였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을 보면 공부 잘하는 게 그다지 인기의 요소는 아닌 것 같다. 같이 잘 놀아주고 재미있으며 인간성까지 좋으면 그만이다. 공부를 잘하거나 외모가 출중하면 인기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된다. 알게 모르게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모종의 질투를 느끼는 것 같다. 이 점은 성인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회가 워낙 경쟁이 심하다보니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좀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익살맞으며 때로는 실수도 하여 자신의 경쟁과 무관해 보이는 그런 사람들이 되레 인기가 많다. 잘 나가는 사람을 보고는 겉으로는 부러워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질투를 하고 속상하기도 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대체로 인기 있는 사람은 학자나 의사나 법률가 등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웃겨서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들이다.

인기보다 덕(德)

그런데 율곡 선생이 경계하는 내용은 이와 좀 딴 판이다. 우선 이렇게 말하고 있다.

〔10〕농담하기를 좋아하고 웃기는 얘기로 시끄러운 것(好作戲謔, 言笑喧囂)

율곡 선생이 경계하는 대상은 되레 요즘 인기 있는 아이의 태도와 유사하다. 물론 인기는 요즘 아이들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과연 학부모들도 자기 자녀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좋아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요즘 도덕의 기준으로 보아 이런 아이가 굳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도 힘들 것 같다. 다만 타인에게 방해가 될 정도로 시끄럽게 떠든다면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을까?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렇게 농담하고 웃기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분명 덕이 없는 행동이다. 앞에서 구용(九容)을 소개할 때 보았겠지만, 농담하고 웃기는 행동은 그것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 이렇게 덕스럽지 못한 행동이기에 경계했던 것이다.

이점은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쉽게 이해할 것 같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자기 고향에서 양반이나 선비의 후손으로 자부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녀들이 큰소리로 떠들거나 크게 웃거나 농담하는 것을 금했다. 심지어 집안에서 크게 노래하는 것도 경계했다. 물론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아무튼 이런 것들이 다 앞에서 말한 덕스럽지 못한 행위와 관계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경계할 것을 더 제시한다. 그것은 이렇다.

 

〔11〕쓸데없는 일과 상관없는 일을 하기 좋아하는 것(好作無益, 不關之事)

쓸데없는 일의 원문은 무익한 일이다. 무익한 일이란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상관없는 일에 속한다. 당시 아일들과 상관없는 일이란 무엇일까? 앞의 글에서 선생이 말한 분위기를 알아차렸다면, 아이로서 해야 할 공부와 상관없는 것이라 보면 되겠다. 그 공부란 글공부도 포함되겠지만, 기본적으로 아이로서 지켜야 할 도덕적 실천에 관계되는 일이다. 가령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롭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 따위가 아닐까?

그래서 그 쓸데없는 일이나 상관없는 일의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역시 『격몽요결』에서 찾아 볼 수밖에 없다. 『격몽요결』에서는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일이 무엇인지 직접 명시한 곳은 없다. 나쁜 습관을 고친다든지 해서는 안 되는 일에서 그것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아이들에게 해당하는 것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어지럽게 드나들고 떠들며 세월을 보내는 것
경전(經典)을 표절해 문장을 꾸미는 것
글씨와 편지쓰기에만 공을 들이는 것
바둑과 장기를 두는 것
배불리 먹고 다툼을 일삼는 것
돈과 음악과 이성(異性)에 빠지는 것

(「혁구습장」)

이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의 가치관에서 볼 때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쓸데없고 상관없는 일들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는 오늘날 어린이들이 경계해야 하는 일에 해당되는 것도 있고 해당되지 않는 것도 있다. 그 해당되지 않는 것 가운데 글씨, 편지쓰기, 장기와 바둑, 음악 등의 일상생활이나 취미생활에 필요한 것들이다. 해당되는 것에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떠드는 것, 표절과 다투는 것, 그리고 이성에 지나치게 빠지는 것 등이다.

도덕적 인간 양성

그렇다면 율곡 선생의 이런 생각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왜 이런 차이가 날까? 그 차이가 나는 근거 또는 배경은 무엇일까? 이런 차이를 인정한다면 선생의 교육관이 오늘날 도움 되는 것이 얼마나 될까? 이것을 알려면 당시 교육관과 그 근거로서 당시 지배하던 사상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유학 특히 성리학이 지배이념이었던 조선시대의 교육목적은 한 마디로 군자(君子)를 양성하는 것이다. 그 이념적 기반은 유학의 경서(經書)에 있는데 특이 『대학』에 나타나 있다. 『대학』은 옛날 태학[대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던 방법을 적은 책이다. 거기에 나타난 3강령과 8조목에 가르침의 목적이 드러나 있다.

대학의 길은 명덕(明德: 천부적 마음)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친하게] 하며[여기며] 지극히 선한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데 있다.

이것이 3강령이다. 8조목은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이다. 바로 여기서 3강령과 8조목의 내용을 보면 대부분 군자의 도덕과 관련이 있고 그 주체가 군자이며, 그 가르침의 끝에는 도덕적 이상세계의 건립과 관련이 된다. 흔히 이 이상세계를 대동사회(大同社會)라 부른다.

이런 군자를 양성하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은 전통사회에서 요구되는 아동의 행위는 도덕적이어야 하며, 사적인 것에 관련된 이익이나 놀이나 취미 따위가 금기시 된다. 왜 이런 놀이나 취미 따위를 금기시 여기느냐 하면,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인욕(人欲) 때문이다. 인욕 그 자체만 본다면 먹을 때 당연히 먹어야 하고 입을 때 당연히 입어야 하니까 없애야 할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온갖 악이 그로부터 발생한다. 오늘날 현실을 보라. 인간의 욕망은 조금이라도 허용되면 점점 더 커져서 끝이 없을 정도로 확대된다. 급기야는 그 욕망 때문에 사회에 피해를 주기도 하고 자신도 망하는 경우를 보지 않는가?

그래서 유학 특히 성리학은 처음부터 아주 기초적인 욕망 외에는 그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이렇게 흥미나 취미 위주의 일을 군자에게 쓸데없거나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도덕이 필요하기는 해도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자본주의가 군림하는 세상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굴러간다. 어떻게 하든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겨 소비를 촉진시키고, 그에 맞는 생산을 함으로써 이윤을 창출시킨다. 그래서 교육이념도 겉으로는 개인의 바람직한 성장이나 소질과 능력을 계발시킨다고는 하지만, 알고 보면 이런 자본주의의 체제에 상응하는 기능인과 소비자를 양성하는 데 있다.

여기서 전통적 도덕은 보편적인 것을 해치지 않는 이상 유지되겠지만, 자본주의에 방해된다면 전근대적이라 하며 폐기되어 버린다. 특히 맹자 이래로 군자는 이익을 멀리한다는 관념이 그것이다. 이제 자본주의적 교양인이라면 불법이나 탈법이 아닐 경우 이익을 좇아 어디든 달려가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국의 경제적 양극화의 주범 가운데 하나인 부동산 투기이다. 군자는 원래 투기를 하지 않는데도, 지금 우리 사회는 그것을 못하는 사람이 무능한 사람으로 통한다.

가만히 있어라?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아이들 때문에 짜증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그렇더라도 대부분의 교사들은 직업윤리 상 그것을 크게 내색하지 않고 넘어간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이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돌아다니거나 떠드는 일이다. 그러다보면 수업 분위기를 해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기도 한다. 그래서 교사들은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가만히 있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돌아다니며 떠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흔히 있었던 모양이다. 전통적으로 이런 행동을 아이의 인성 또는 잘못된 습관이나 버릇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근대식 학교가 생기면서 교실이라는 좁은 공간에 많은 아이들을 몰아넣고 오전 내내 때로는 오후까지 가르치다보니 지루하고 따분해서인지 이런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아이를 탓하기 전에 좀 더 솔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진화해 온 시간에 비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이렇게 모아놓고 가르친 역사가 얼마나 길겠는가? 그 긴 진화의 과정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먹고 살기 위해서 또는 맹수를 피하기 위해 들판이나 산속, 때로는 물가를 뛰어다니면서 보내지 않았겠는가? 기껏해야 몇 천 년도 되지 않는 시간의 역사를 가지고 유전자에 각인된 그 긴 시간의 역사를 어찌 뛰어 넘을 수 있겠는가?

어찌 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활동하는 존재이다. 특히 어린 시절은 더욱 그러하다. 인간의 성장이 인류 진화의 과정을 밟아 재현한다는 이론을 따른다면, 어린이들이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뜀박질하거나 떠들거나 돌아다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더구나 자기 행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주의력 결핍 또는 과잉행동 장애라는 것도 있다.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고 막무가내로 꾸중하고 야단친다고 해서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겠는가? 다른 해결 방법이 요구된다.

남을 잘 웃겨야 성공한다

성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농담을 좋아하고 남을 잘 웃기는 말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인 인욕(人欲)과 관련된 일이어서 덕이 없어 보이고, 자칫 지나칠 경우 불선(不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성리학적 이념이 작동을 멈춘 지 오래되었다. 이제 인간은 도덕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위해 사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 이익이 인간의 욕망 충족에 절대적인 것이므로, 오늘날은 가히 욕망의 해방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이런 해방을 만끽하는 사람은 부자들에게 해당되기 때문에, 너도나도 부자가 되려고 서로 경쟁한다.
이제 사람들은 도덕적 모범생보다 농담을 잘하고 자기들을 잘 웃기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개그맨이나 또 이와 유사한 연예인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들의 신상이나 생일 따위를 잘 기억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조부모나 부모의 그것을 모르는 이들도 있다. 또 장래희망조사에서 과거에는 연예인을 선호하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압도적이다. 연예인이 인기를 얻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실제로 유명 연예인은 성공의 상징으로 통한다. 지상파를 포함하여 케이블 티브이의 채널이 얼마나 많은가?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가히 연예인 천국이다. 그래서 연예인들을 자본주의 아이콘이라 말하지 않던가?

그러니 이제 아이들이 농담을 잘하거나 남을 잘 웃기는 일은 권장 사항이지 금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어차피 무슨 일을 하든 먹고 살아야 하고, 더 나아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욕망을 마음껏 충족시키기에 도움이 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