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방(尹昉, 1563-1640)


 

윤방(尹昉, 1563-1640)                                          PDF Download

 

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국조인물고」에는 한문4대가(漢文四大家)의 한 명으로 유명한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이 쓴 신도비명이 실려 있는데,

“어릴 적에 우계(牛溪, 성혼成渾)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는데, 경전(經傳)의 심오한 뜻을 연구하고 종합하여 가끔씩 창을 들고 방에 들어가곤 하니, 그때마다 두 분 선생도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라고 적고 있다.

이식의 신도비명은 상세하기와 추숭하는 마음이 글에 묻어나오는 것이 여느 신도비와 비교하여 각별한 점이 있는데, 이는 이식이 「신도비명」의 서두에서 공의 겸손함의 덕량에 감복하는 바가 있어서 후세에 그 전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는 개인적인 소회를 밝히는 대목에서 그 연유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자는 가회(可晦)이고 호는 치천(稚川)이며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황기(黃琦)의 손녀로 참봉 대용(大用)의 딸이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윤두수는 이황(李滉)과 이중호(李仲虎)의 문인이었지만 젊어서부터 성혼, 이이, 정철 등과 친교를 맺고 동서분당 시에는 서인에 가담하였다. 1555년 생원이 되고,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철(鄭澈)이 화를 입자 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하여 어영대장(御營大將),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급박한 상황에서 평양(平壤)이 위태로워지자 의주(義州)로 피난갈 것을 주장하여 실현시켰고, 요동(遼東)으로 피난하려는 계획을 반대하였다. 1594년 세자를 시종하여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가 되었고 1595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왕비를 해주(海州)로 시종하였다. 1599년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남파(南坡)로 돌아갔다.

윤방은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임명되고 이어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봉교·예조좌랑이 되었다. 곧 사헌부정언으로 옮겨 병조판서 이양원(李陽元)의 인사 부정을 탄핵하다가 성균관전적으로 체직되었다. 1591년 당쟁으로 아버지가 유배당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바로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철(鄭澈)이 화를 입자 이에 연루되어 유배된 사건이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아버지가 재상으로 다시 기용되자, 예조정랑으로 발탁되어 선조를 호종하였다. 이때 대부인(大夫人)이 서거(逝去)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는데, 선조가 청요직을 두루 제수하고, 이조 좌랑을 거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승진시키기까지 하였으나 모두 배수(拜受)하지 않았다. 이때 왜적이 사방에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낮에는 숨고 밤에 달려가 몰래 빈소(殯所)에 이르러서는 곡읍(哭泣)을 하며 자리를 지켰는데, 몇 번이나 왜적을 만났어도 다행히 빠져 나오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공의 효심에 하늘이 감동한 결과라고 일컬었다.

곧 직강·사예가 되고 다시 당론이 일어나 아버지가 파직 당하자 스스로 파직을 요청해 대각(臺閣)에서 물러났다가 곧 군기시첨정에 제수되었다. 이어 경상도순안어사(慶尙道巡按御史)로 나가 치적을 올리고 군기감정(軍器監正), 평산부사를 거쳐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끝나자 추관(推官)으로 활약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순안독찰(巡按督察)이 되어 군량 운반을 담당하고 곧 철원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동부승지로 승진되어 돌아오자 그 곳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1601년 부친상을 마친 뒤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병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에 보임되었다가 도승지로 전직되었고 다시 한성판윤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올랐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경기도, 경상도의 감사를 지냈다. 이어 겸지춘추관사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615년(광해군 7) 다시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해 폐모론이 있자 병을 핑계로 정청(政廳)에 불참해 탄핵을 받고 사직 은퇴하였다.

윤방은 그의 중자(仲子)인 윤신지(尹新之))가 선조의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하여 왕실과 인척(姻戚)의 관계였지만 평소 자신의 몸가짐을 엄하게 단속하여 사사로운 정의를 돌아보지 않았고 자제와 노복(奴僕)들도 감히 이를 어기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궁중에서는 윤방이 집안일을 돌아보지도 않고 인척 관계를 맺은 후의(厚意)도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비난을 하기도 했지만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해지면서 인척 집안의 중신(重臣)들이 모조리 화망(禍網)에 걸려들었을 적에도 윤방은 초연(超然)히 화를 면할 수가 있었으므로 논하는 이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라 여겼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예조판서로 등용되고, 이어 우참판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곧 우의정에 올랐다. 다시 좌의정으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 민심 수습에 공헌했으며, 1627년(인조 5) 영의정이 되었다.

이괄의 난을 피하여 대가(大駕)가 천안(天安)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적이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이에 윤방이 먼저 경성에 들어가서 수습하겠다고 자청하고는 단기(單騎)로 치달려 들어가 보니 도성 사람 가운데 적을 따랐던 자들이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관망(觀望)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윤방은 수악(首惡) 약간 명만을 본보기로 처형한 다음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살려 주어 새로운 길을 걷도록 허락하였다. 이때에 역적을 따른 사람 수천 명의 명단이 적힌 문안(文案)이 발견되었으므로 종사(從事)하는 관원들과 친근한 사람들이 다투어 살펴보려고 하였는데 윤방이 이것을 모두 가져다가 불태워 버리니 도성 안이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 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피난을 주장해 강화에 호종했고, 영의정에서 물러나 판중추부사를 역임한 후 1631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묘사제조(廟社提調)로서 40여 신주(神主)를 모시고 빈궁(嬪宮),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였다. 그 후 강화가 체결되고 돌아오는 중에 왕후의 신위 하나를 분실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앞서 윤방은 청군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일삼게 되자 밤에 묘우에 모셨던 40여 개의 신주(神主)를 나누어 담아 땅을 파고 묻어 두었다. 그 다음날 아침 청군이 불을 질러 묘우는 모조리 소실(燒失)되고 말았다. 그 후 남한산성에서 이미 화의를 맺고서 청군이 빈궁과 대군을 맹약(盟約)의 장소에 모이게 할 것을 요구하자 묻어두었던 신주를 꺼내어 두 명의 노복(奴僕)으로 하여금 짊어지고 가게 하다가 길에서 말을 얻어서 그 위에 싣고 가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도에 머물러 있던 오랑캐 군사들이 재물을 약탈하는 바람에 공사(公私) 간에 숨겨 보관해 두었던 물건들이 모두 파헤쳐지게 되었다. 종묘의 신주가 전후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위기일발(危機一髮)의 순간이었다. 그 와중에 생각지도 못하게 왕후(王后)의 신위(神位) 하나가 없어진 것이다.

이를 두고 처음에는 신위 전부가 소실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사태가 일단 진정된 뒤에 조정이 뒤바뀌면서 의논이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신주 봉안에 잘못이 있었다는 탄핵을 받고 1639년 연안에 유배되었다가 2개월 후 풀려나 다시 영중추부사에 기용되었다.

임종(臨終)할 때에 윤방은 의기(意氣)가 편안하고 한가롭기만 하였으며 사적(私的)인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몸소 ‘낙천지명 승화귀진(樂天知命乘化歸盡)’이라는 여덟 글자를 썼는데, 자획(字畫)이 평상시처럼 생동감이 있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리에 누워 운명하였다. 그의 나이 78세였다.

이식은 윤방의 풍모와 행적을 「신도비」의 말미에서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공은 얼굴이 넓적하고 체구가 우람한 데다 온몸에서 덕기(德氣)가 흘러 넘쳤으므로, 사람들이 공을 바라보기만 해도 공이 대인(大人)이요 장자(長者)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지극한 성품으로 순후하고 근실하여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일이 없었으며, 관직 생활을 하며 일을 처리할 때에도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하면서 경계(境界)를 두지 않았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의 기준과 척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근거 없는 소리에는 결코 현혹되는 법이 없었다.

공은 풍도(風度)가 중후하고 심원하였으며, 기뻐하고 성내는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종신토록 옆에서 모신 자도 공이 급하게 말을 하거나 야비한 언사를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비록 느닷없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 행동이 항상 평소와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공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공의 덕량(德量)과 기국(器局)을 우러러 사모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공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품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공이 정승의 자리에 있게 되었을 때로 말하면, 그야말로 난세(亂世)를 평정하고 새로운 개혁 정치를 행하려던 때였다. 그래서 훈신(勳臣)과 명사(名士)들이 각각 자신들의 의견을 고집하고 있었고, 여러 대신(大臣)들도 이에 따라서 입장을 달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공은 오직 성심(誠心)으로 대하면서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쪽에 가담하였을 뿐, 편당(偏黨)을 지어 따르는 일은 결코 없었기 때문에, 여론에 막히는 일이 없는 가운데 모두들 공을 모시고 일하기를 즐겨하였다.

공은 집안에서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부모의 안색을 살피며 어버이를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일찍이 어버이의 병환을 간호할 적에는 옷을 그대로 입고 허리띠를 풀지 않은 것이 거의 1년이나 되기도 하였다. 형제로부터 시작해서 내외의 친척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집안이 성대하였는데, 공은 치우침이 없이 두루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어느 집을 막론하고 모두 공을 의지하며 귀의하였다.

공은 세 차례나 중국에 다녀왔는데도 돌아오는 보따리 속에는 중국 물건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으며, 조정에 몸담은 50년 세월 동안 여러 번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였는데도 끝내 전장(田庄) 하나를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집에는 사방에 벽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따름이었으며, 의복(衣服)이나 기용(器用)을 보아도 검소하기가 마치 빈한한 선비의 생활을 연상케 하였다. 이처럼 청렴결백한 절조가 당대에 둘도 없을 정도였는데도, 정작 공은 털끝만큼도 자긍(自矜)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윤방의 중후한 인품과 지극한 효성이 손에 잡힌다.

저서로는 ⌈치천집⌋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