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필(黃在弼)


황재필(黃在弼)                                                              PDF Download

 

황재필(黃在弼, 1847년 ∼ 1893년)은 조선시대 말기의 학자로 일찍이 한문을 배워서 글재주가 있었으며 학문의 성취가 빨랐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실패하고 벼슬길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이후 스스로 경학연구에 전념하고 주위의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배움에 힘썼다. 그 아들이 황종관(黃鍾寬) 편찬한 시문집 『단파유고(檀坡遺稿)』 5권에는 그가 ⌈논어⌋, ⌈맹자⌋ 등을 연구하여 서술한 「(疑)」와 200편에 가까운 시문이 실려 있다.

 

1847(1, 헌종 13)
의금부도사 황은섭(黃殷燮)과 연안김씨(延安金氏) 김정(金鉦)의 딸 사이에 전라북도 고창 성내면 대천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해(平海)이며, 자는 양언(良彦), 호는 단파(檀坡)이다. 안촌(安邨) 황이후(黃以厚) 후손이다. 황이후는 이괄(李适)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군량(軍糧)을 모아 병영에 보내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전주에서 기의하여 공훈을 세웠다.

그는 어려서 집안의 할아버지 저파공(樗坡公) 밑에서 글을 배웠다. 재주가 있어 학문 성취가 빨랐으며 집안에서 기대가 컸다. 그러나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였다. 계속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길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경학(經學) 연구에 전념하였다. 곽기옥(郭琦玉), 서문백(徐文伯), 김성도(金聖道), 민승호(閔升鎬) 등 인근 유림들과 교류하면서 시문을 짓고 서신을 왕래하였다.

그는 ⌈논어⌋, ⌈중용⌋, ⌈대학⌋ 등 사서(四書)에서 의심나는 대목을 뽑아서 스스로 답하고 여러 학자의 설을 이용하여 고증한 뒤, 의(疑)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문장들은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예(禮)에 대하여도 일가견을 가지고 제도를 연구하고 설명을 붙였으며, 후학 양성을 위해서 강석(講席)을 마련하여 경전과 예법을 강의하였다.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직접 시행하기도 하였다.

 

1893(47, 고종 30)
동학(東學)이 일어나 마을사람들 가운데 가담하는 자가 많아졌다. 황재필은 그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사람들을 모아 난에 가담하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향년 47세로, 이 해에 사망하였다. 저서로 『단파유고(檀坡遺稿)』 5권이 있다. ⌈단파유고⌋는 1929년에 아들 황종관(黃鍾寬)이 부친의 시문을 모아 간행하였는데, 5권 2책으로 구성되어있다. 목활자본이며, 권두에 백낙규(白樂奎)의 서문이 있다. 권말에 종제(從弟) 황재용(黃在涌)과 김재준(金在駿), 고광두(高光斗), 황종관(黃鍾寬) 등의 발문이 있다.

권1·2에는 시(詩) 136수, 서(書) 10편, 서(序) 4편, 기 1편(「시은기(市隱記)」), 제문 2편(「제김진사문(祭金進士文)」외 1편), 축문 8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3·4에는 잡저 7편이 들어있는데, 「유건설(儒巾說)」, 「단설(檀說)」, 「과정문견록(過庭聞見錄)」, 「장남종관혼서(長男鍾寬婚書)」, 「차남종국혼서(次男鍾國婚書)」 등이 실려있다. 이중에 「유건설(儒巾說)」은 선비들이 쓰고 다니는 두건을 설명한 것이으로 그 제도와 유래, 사용처 등을 밝혔다. 「과정문견록(過庭聞見錄)」은 자신의 아버지 황은섭(黃殷燮)의 일상생활과 언행을 기록한 것이다.

또 의(疑)가 15편 수록되어 있는데, 「대학문제(問題)」 2편, 「중용문제」 2편, 「맹자문제」 3편, 「논어문제」 8편이 있다. 이것은 황재필이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유교 경전을 공부하다가 생각나는 의문점에 대하여 여러 설을 이용하여, 풀이하고 자기의 견해를 덧붙인 것이다.

권5는 부록으로 행장, 묘갈명, 향천장(鄕薦狀), 도천장(道薦狀), 단파정상량문(檀坡亭上樑文), 단파정운(檀坡亭韻) 98수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황재필의 문장은 실려 있지 않다.

1930년에, 황재필의 아들 황종관(黃鐘寬)은 부친을 기리기 위해서 단파정(壇坡亭)을 건립했다. 그리고 1939년에 영석재(永錫齋)를 건립하였는데, 이 두 문화재는 고창 성내면 대천(大川)마을에 있다. 원래 단파정은 황재필이 살았던 시기에 지어졌으나 없어지고 아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하지만 현재 보이는 단파정은 1930년대에 지은 단파정이 아니고 나중에 다시 지은 것이다. 지금 모습은 정자 중심에 팔각정의 방이 있다.

대천마을은 신대리에 속해 있는데 신대리는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으로 원래는 신정리(新亭里)와 대천리(大川里)로 구성된 마을이다. 신정리의 ‘신(新)’자와 대천리의 ‘대(大)’자를 따서 ‘신대(新大)’가 된 것이다. 이곳은 조선 중기 평해황씨(平海黃氏)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본래는 흥덕군(興德郡) 이동면(二東面)의 지역이다. 이후 1914년 4월 1일에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봉서리(鳳西里), 대천리, 해평리(海坪里), 신정리, 옥교리(玉橋里)의 각 일부와 이서면(二西面) 왕동(王洞)이 병합되어 신대리가 되었고, 성내면에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권호기, 「황재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권호기, 「단파유고」,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윤종호,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신대리」,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인교, 「南道 정자기행(2629)-고창 단파정(檀坡亭)」, 한국매일, 2015.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