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李光秀, 1873-1953)


 

이광수(李光秀, 1873-1953)                                  PDF Download

 

광수(李光秀, 1873년 ~ 1953년)는 대한제국의 문신, 정치인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조선 왕족의 후손으로 자(字)는 미중(美中), 호는 옥산(玉山), 양녕대군의 17대손이며 추성수(秋城守) 이서(李緖)의 14대손이다. 본관은 전주이다.

1900년(광무 4)에 관직에 제수되고 가자(加資)를 받아 통훈대부 당하관 정3품에 올랐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을사조약 체결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활 잘 쏘는 사람 수십 명을 모집하여 대궐 근처에 숨어 있다가 5적(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을 대궐 문밖에서 쏘아 죽이려 하였으나 5적 중 권중현(權重顯)을 쏘다가 놓쳐버려 실패하고 왜군에 붙잡혀 진도로 정배되어 1년 후에 풀려났다.

1919년 3·1 운동 때에도 참가했으며 그와 함께 가담했던 동지인 양한묵(梁漢默)은 감옥에서 죽었다.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사람을 보내 회유하는 한편 전라도 관찰사를 제수토록 하였으나 친일파와는 같이 일할 수 없다 하여 거절하였다. 그 뒤 고종 태황제와 순종 융희황제의 인산에 차비관(差備官)을 지냈다.

유저인 옥산집(玉山集)은 1962년 아들 혁(爀)이 편집 간행하였다. 효당(曉堂) 김문옥(金文鈺)의 서문과 행주(幸州) 기노장(奇老章)의 발문이 있다.

「정미의소(丁未擬疏)」는 1907년 자신이 왜적을 토벌하고 5적의 주륙(誅戮)을 계획하여 성사시키면 상소하려고 작성한 글이다. 일이 여의치 못하자 원본은 불에 태워버렸는데, 이것은 신채호(申采浩)가 외워서 기록한 것이다.

서(書)는 기우만(奇宇萬)·신기선(申箕善)·이용직(李容稙)·이종문(李種文)·이도재(李道宰)·정만조(鄭萬朝)·윤용구(尹用求)·이항선(李恒善)·민형식(閔衡植)·윤희구(尹喜求) 등 당대의 명류들과 주고받은 것으로, 학문과 국사를 논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서(序)에는 기우만이 삼산(三山)에서 지은 급문록(及門錄)의 서문인 「삼산채산록서(三山採山錄序)」를 비롯하여 「별숭양여사훈서(別崧陽呂士薰序)」 등이 있다. 기에는 아버지 최선(最善)이 훈학(訓學)하던 대(臺)의 기문인 「명농대기(明農臺記)」와 「초현당기(招賢堂記)」·「면앙정중수기(俛仰亭重修記)」·「유금강기(遊金剛記)」·「도남재기(道南齋記)」 등이 있다.

설에는「삼호설(三乎說)」·「회산설(晦山說)」·「회봉설(晦峯說)」·「내와설(耐窩說)」 등 호설(號說)과 「문여자설(聞汝字說)」·「반신농산저의설(反申農山沮義說)」 등이 있다. 전에는 송범진(宋範鎭)의 「송효자전(宋孝子傳)」, 조규현(曺奎鉉)의 「조의사전(曺義士傳)」 등이 있다. 그밖에 「박효자사실(朴孝子事實)」·「나열녀전(羅烈女傳)」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