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행(金令行,1673-1755)


 

김영행(金令行,1673-1755)                                  PDF Download

 

1673(현종 14)∼1755(영조 31).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유(子裕), 호는 필운옹(弼雲翁)으로 아버지는 관찰사 김시걸(金時傑)이다. 아버지 김시걸은 자가 사흥(士興)이며, 사람됨이 효우(孝友)에 도탑고 선행을 즐기고 의리를 좋아하며 겉보기는 온화하고 평이한 듯하나 속은 실로 강직하며 더욱이 강상윤리의 대도를 지키는 것이 매우 확고하였다. 두 아들이 있었으니 김영행(金令行)과 김정행(金正行)이다. 김영행의 아들로는 생원(生員) 김이건(金履健)과 김이선(金履選)․김이원(金履遠)․김이억(金履億)이 있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다.

조상의 은덕으로 벼슬을 얻어 현감이 되었다가, 1723년(경종 3) 소론 김일경(金一鏡) 등에 의해 노론 김창집(金昌集)의 일당이라 하여 파직되어 경상도 기장현(機張縣)에 유배되었다. 이것은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 일족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신원, 복권시킨 일을 말한다.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는 소현세자의 부인이다. 병자호란으로 남편 소현세자와 함께 도르곤에 의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귀환했다. 민회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상소를 처음 올린 김홍욱(金弘郁: 1602~1654)은 국문을 받던 중 장살되었는데, 이는 민회빈의 무죄가 알려지는 것을 인조(仁祖)가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인조는 자신의 반청(反淸)노선에 반기를 드는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결국 귀국한 지 두 달 뒤인 4월 23일 인조의 어의 이형익의 시침을 받고, 3일 후 소현세자는 34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때문에 당대에도 신독재 김집, 송시열, 김홍욱, 송준길 등은 그녀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 여러 번 억울함을 신원하는 상소가 올려졌으나 거절되었고, 숙종 때 송시열이 다시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숙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의 신원 상소로 복관되었다.

그 뒤 1725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우사어(右司禦)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서 임천군수(林川郡守)를 거쳐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을 모은 ⌈필운시문고(弼雲時文稿)⌋가 전한다.

필운시문고는 조선 후기의 문인 김영행의 시문집이다. 모두 9책이고 필사본으로 1747년(영조 23) 아들 김이건(金履健)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이 책의 권두에는 김이건의 발문이 있다. 그에 따르면, 김영행은 김창흡(金昌翕)에게 시를 배워 당시(唐詩)에 가깝다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어릴 때에 시는 두보(杜甫)의 것이 아니면 조잡한 것으로 여기고, 문장은 유종원(柳宗遠)의 것이 아니면 비루하게 여겨 이를 본떴다. 뒤에 이것이 옛사람의 껍데기를 흉내낸 것임을 깨닫고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필운시문고 제1∼4책은 「필운시고」로 시 623수와 부록으로 송창유고(松牕遺稿)가 실려 있다. 제5∼9책은 「필운문고」로 제문 29편, 문(文) 3편, 가장(家狀) 2편, 변방(辨謗)·유사·책문(策問) 각 1편, 청정장암발구장심경(請鄭丈巖跋舊藏心經), 서연일기(書筵日記), 잡저 3편, 장(狀) 16편, 서(書) 19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필운시문고의 시는 19세 때인 1691년(숙종 17)의 작품부터 실려 있다. 평생의 지우 윤백욱(尹伯勗)․이병연(李秉淵)과 숙부나 아들과 조카들에게 준 시가 많다. 시의 내용도 원로에서의 가족이나 친지 걱정이 주류를 이룬다. 가정사를 다룬 작품도 고풍(古風)에 가깝게 되어 사우(士友)에게 널리 읊조려진 경구(警句)가 많았다는 아들 이건의 지적대로, 시가 쉬우면서도 고풍을 풍긴다. 또한 노론 김창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기 때문에 김창협의 당으로 지목되어 당쟁의 화가 잦았다. 윤백욱과 이병연 등의 산수벽(山水癖: 자연을 좋아하는 습관)에 경도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필운시문고의 「송창유고」는 요절한 사촌 동생 김이정(金履禎)을 대신하여 김이건이 숙부의 시 37수를 모은 것이다. 제문은 대부분 가족과 친척들에 대한 것이다. 필운시문고의 문에는 1697년 도봉서원의 벽에 서원의 유래와 의의를 적은 「서도봉원벽(書道峰院壁)」, 1701년 병을 앓으면서 엄부(嚴府)의 행적을 회상한 「병중지애(病中志哀)」, 오랜 친구에게 보낸 편지글 「서증채문규선면(書贈蔡文揆扇面)」 등이 있다. 「변방」은 1713년 아버지의 막내아우인 김시보(金時保)의 비방을 변명한 것이고, 유사도 1742년 김시보의 언행을 기술한 글이다. 필운시문고의 책문은 1699년 증광시에 응시하였을 때에 지은 글이다. 관제(官制)․병제(兵制)․전제(田制) 등에 대하여 논하였다.

「청정장암발구장심경」은 1716년 유승선(柳承宣)과 자신의 집에 나누어져 보관되어 오던 심경(心經)을 합치고 발을 구한 내용이다. 「서연일기」는 과거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나 뛰어난 문사와 식견으로 경연(經筵)에 입시하는 벼슬에 추천되었을 때인 1717년 9월부터 10월 사이의 일을 적은 것이다.

⌈필운시문고」의 잡저에는 주위의 비방이 심하여지자 밭을 갈고 샘을 파 세상사에 뜻을 끊고자 하여 지은 의추재의 경과를 적은 「조휘곡의추재서사(朝暉谷依楸齋書事)」과 꿈에 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적은 「기몽(記夢)」, 5대조 김상헌(金尙憲)의 규식을 변통하여 혼란해진 묘제를 시정하고자 정조(正朝)․단오․한식․추석의 묘제(墓祭)에 관련된 규식을 정한 「묘제식례(墓祭式例)」 등이 있다.

「필운시문고」의 장에는 자신에게 욕한 유생의 처리문제, 흉년이 들어 진휼방법을 보고한 것, 소의 도살을 금하였는데 이를 위반한 일을 변명한 것, 수어청(守禦廳) 토지를 도지 주고 그 세금징수에 관한 문제, 사사로이 군정(軍丁)과 전선(戰船)을 쓴 데 대한 변명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지방 관리의 여러 정사를 살필 수 있다. 서(書)는 대개 가족과 신상의 문제, 선대의 제사나 묘지에 대한 글들이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한국계항보(韓國系行譜)」(조용승, 198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