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매순(金邁淳:1776년~1840년)


김매순(金邁淳:1776년~1840년)                      PDF Download

 

선 후기의 학자이며 문신으로, 자는 덕수(德叟), 호는 대산(臺山),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는 참봉 이수(履鏽)이며, 어머니는 죽산 안씨(竹山安氏)로 종주(宗周)의 딸이다. 1795년(정조19)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그 뒤에 검열(檢閱)과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등을 거쳐 초계문신(抄啟文臣)에 선발되었다. 이어서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자(陞資)하여 예조 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하고 외직인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를 지냈다. 그의 사후, 고종 때에 판서(判書)로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덕행(德行)으로 저명하였으며, 문장에 뛰어나서 김택영(金澤榮)이 꼽은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에 들었다. 그리고 성리설(性理說)이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둘러싼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의 대립의 양상을 보일 때 그는 한원진(韓元震)의 호론을 지지하였다. 저서로는 《대산문집(大山文集)》, 《전여일록(篆餘日錄)》, 《대산공이점록(臺山公移占錄)》, 《주자대전차문목표보(朱子大全箚問目標補)》, 《궐여산필(闕餘散筆)》,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등이 있다.

그는 평소에

“글은 바르고 간결하고 진실해야 하지만, 마음의 미묘한 양상을 남에게 알리자면 번거로워지고 비유를 하게 되고 뜻을 돌려서 나타내게 된다.”

라고 하여 창작의 어려움을 말한 바 있으며, 문장(文章)에 있어서도 정통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그는 또 김직보(金直甫)김직보(金直甫:1732~1785): 직보는 대산의 문인인 김종경(金宗敬)의 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구재(苟齋)이다. 1774년(영조5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대산과 함께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를 편찬하였다.《高山及門錄 卷1》에게 보낸 장문의 답서에서 학문적인 견지에서 신랄하게 토론을 벌이곤 하였는데 그 중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낮추어 깊이 생각하고 조용히 수양하면 도리는 단지 평이하고 실질적인 곳에 있으니 무슨 헛되이 과장할 것이 있겠는가. 학문하는 것은 단지 본분이니 어찌 차이를 귀하게 여기겠는가. 일상생활 속에서 부지런히 노력하여 오직 의리가 무궁하다는 것을 알아 중단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아 더욱 매진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내면의 성찰이 깊으면 저절로 외면을 추구할 겨를이 없을 것이고 자신을 다스림이 세밀할수록 남을 대함에 있어 더 많은 여지가 있게 되어, 말과 일에 드러나는 것이 진실되어 헛됨이 없을 것이고 중후하여 깊은 맛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교유하고 강론할 때에는 곧고 성실한 사람을 친구로 삼고 아첨을 잘하는 사람과는 사귀지 말아야 할 것이며, 덕과 의를 소중히 여기고 사사로운 고식(姑息)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는 내면을 깊이 성찰하다보면 자연히 외면을 추구할 겨를이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자신의 수양을 세밀하게 해야만 남을 대할 때 여유가 있게 되어 말이나 일에 나타는 것이 중후해지고 깊은 맛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실질적인 학문하는 자제를 설파한 것이다. 그리하여

“소박하고 진실되게 마음을 쓰며 차츰차츰 진행해 가면 의지할 만한 실제의 터전이 있게 되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된다.”

라고 하였다.
이는 단지 이론만으로 언급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체험에서 울어난 수양의 일면을 가감이 없이 전달한 것으로 여겨진다. 진지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렇듯 학문에 관한 것만 언급한 한 것이 아니라 민간의 풍습에 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의 저작 중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가 바로 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관련한 내용으로 떡국에 관한 것을 잠시 정리해 보기로 한다.

떡을 뽑는 기계가 없던 당시에는 사람들이 손으로 비비고 뽑아 떡을 길게 늘여서 만들었다. 떡메로 마구 쳐서 그 덩어리가 무르고 부드러워지게 한 다음, 비벼가며 길게 뽑는 방식이었다. 이런 손동작으로 만든 긴 가래떡을 ‘비벼 만든 떡[拳模]’이라고도 했다. 이렇게 만든 떡을 잘게 썰어 끓인 떡국의 국물 또한 다양한 재료를 썼다. 이러한 내용을 그의 저서 《열양세시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먼저 장국을 끓이다가 국물이 펄펄 끓을 때 떡을 동전처럼 얇게 썰어 장국에 집어넣는다. 떡이 끈적이지도 않고 부서지지도 않으면 잘 된 것이다. 그런데 돼지고기, 소고기, 꿩고기, 닭고기 등으로 맛을 내기도 한다.”

이처럼 떡국에는 장국을 기본으로 하되 다양한 육수를 썼다. 그리고 여기에 반드시 풍미를 북돋는 향신료를 더했다. 같은 시기의 사람 홍석모(洪錫謨:1781~1857)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정조 때의 학자 홍석모(洪錫謨:1781~1857)가 한국의 열두 달 행사와 그 풍속을 설명한 책이다. 모두 22항목으로 되어 있으며 한국 민속의 유래를 고증을 통해 자세하게 밝혀 놓았다. 뒤에 이 필사본을 홍승경(洪承敬)이 광문회(光文會)에 기증하여, 광문회에서는 1911년에 김매순(金邁淳)의 ≪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와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 京都雜志≫를 합본하여 1책의 활자본으로 발행하였다. 그 뒤 이 3책은 합본으로 여러 곳에서 간행되었으며, 우리나라 세시풍속연구의 중요한 기본문헌으로서 활용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함께 제시해본다.

 

“멥쌀가루를 쪄 큰 떡판 위에 놓고 떡메로 수없이 쳐 길게 뽑은 떡을 흰 떡(白餠)이라고 한다. 이를 얇게 엽전 두께로 썰어 장국에다 넣고 끓인 다음 쇠고기나 꿩고기를 더하고 번초설(蕃椒屑)을 쳐 조리한 것을 떡국(餠湯)이라고 한다.”

 

학문과 수양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처럼 우리의 풍습에 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일일이 적어서 소중한 기록으로 남겨 놓은 세심함을 보였다.

다시 언급하거니와, 김매순은 김창흡(金昌翕)의 후손으로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학자이며, 홍석주(洪奭周)와 함께 가장 높은 수준의 고문(古文)을 시범한 작가이기도 하다. 파란 많은 생애를 살다가 65세의 노경에 병마(病魔)에 시달렸던 그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 한강을 건너 화장사(華藏寺)를 찾은 것은 이생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아들과 제자 유신환(兪莘煥)과 김상현(金尙鉉)만을 데리고 간 단출한 나들이였던 이곳이 지금은 동작동 국립묘지 안에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라 불리우는 절로 남아 있다. 그가 이 사찰을 유람하고 나서 기록을 남겼는데, 문장가답게 잘 정리되어 있는 필치로

“이번 여행에서 세 가지를 얻은 것이 있다.”

라고 하여 그 세 가지를 기문(記文)의 말미에다 열거해 놓았다. 번역한 전문을 옮겨보기로 한다.

첫째, 사찰과 산수는 모두 빼어난 볼거리라 할 만하다. 어떤 짐승은 이빨만 뛰어나고 어떤 짐승은 뿔만 뛰어나니 이 둘을 겸할 수는 없는 법이다. 땅이 너무 드러나 있으면 닭과 개 울음소리가 가까운 것이 싫고, 땅이 너무 궁벽지면 수레나 말을 타고 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치러야 한다. 이 산은 그다지 깊지도 얕지도 않아서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너면 바로 왁자지껄한 속세와 멀어질 수 있다. 산을 오르거나 물을 건너기에 모두 딱 적당한 곳을 찾자면 바로 여기라 하겠다.

둘째, 그저 너무 적막한 것을 면하려고 여러 사람을 불러 모으다가는 다툼이 일어나기 쉽다. 두 명의 벗과 아이 한 명이면 충분한 성원이다. 경형(景衡) 경형(景衡): 대산의 제자 유신환(俞莘煥)의 자이다.
은 뜻이 굳고 마음이 고요하여 겹겹의 관문을 뚫을 만한 공력을 지녔다. 위사(渭師) 위사(渭師): 대산의 제자 김상현(金尙鉉)의 자이다.
는 정신이 탁 트이고 칼날처럼 날카로워 만 리 높은 하늘로 날아오를 기상이 있으며 봄빛에 꽃이 만발하여 겨울이 되어도 시들지 않을 듯하다. 인아(寅兒) 인아(寅兒): 대산이 김정순(金鼎淳)의 아들 선근(善根)을 후사로 들였는데, 인아는 그의 아명인 듯하다.
는 어린 새가 지저귐을 배우는 듯 또한 수창(酬唱)에 참여하였다. 일행 모두가 제대로 되었다 하겠다.

셋째, 임금이 편안하고 신하가 수고로우면 막힌 것이 뚫리고 더러운 것이 제거되듯 어려운 일이 술술 풀리고, 잠자리가 아름답고 음식이 맛나면 심신이 조화롭게 되는 법이니, 어찌 천운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꼭 그렇다고 단언을 할 수는 없겠지만, 어찌 이러한 공을 아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물이 찬지 뜨거운지는 직접 마셔봐야 아는 법인데, 위사는 무슨 걱정을 그리 지나치게 하였던가? 이 모두 기술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기술한 이 세 가지 중에 첫 번째는 장소의 알맞음을 말하였고, 둘째는 구성원의 적합함을 언급하였고, 세 번째는 신하로서의 임금에 대한 은혜를 언급하였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임금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는 그의 태도에서 여러 가지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는 인생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할 30대 초반에 정치권으로부터 소외되어 양주(楊州) 미음(渼陰)에 은거하며 지내야만 했다. 한 편으로 생각하면 20년에 가까운 재야생활이 그에게는 학문과 작품활동에 몰두할 수 있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시기였는지 모른다. 이 기간 동안에 그의 대표적인 학술서인 《주자대전차의문목표보(朱子大全箚疑問目標補)》와 당시 우리 풍속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민간의 풍습을 절기별로 정리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등 훌륭한 문학작품들은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후 50대부터 복권되어 차츰 관직에 나아가긴 하였으나, 외직(外職)으로만 돌았을 뿐 내정(內政)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그의 저서 《대산공이점록(臺山公移占錄)》은10여 년에 걸친 지방관의 행정 경험을 문헌으로 정리한 것이며, 《궐여산필(闕餘散筆)》은 말년에 물러나 평생 동안 공부한 내공을 정리한 것이다. 그는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참고문헌>
– 《대산집(臺山集)》
– 《헌종실록(憲宗實錄)》
– 《민족문화대백과》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