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원(金泰元,1863-1932)


 

김태원(金泰元,1863-1932)                                  PDF Download

 

1863(철종 14)∼1932.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다.

관은 해풍(海豊). 자는 춘백(春伯). 호는 집의당(集義堂)으로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 성균관 진사를 지낸 김집(金鏶)과 어머니 재령 이씨(載寧李氏) 사이에서 1863년 9월 15일에 서울 주자동(朱子洞) 사저에서 태어났다. 1932년 3월 5일 정오에 원주(原州: 지금의 영월)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70세였다. 원주 공순원(公順院) 한남산(漢南山) 유좌(酉坐 :동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1863년(고종 원년)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무관직인 별군직과 선전관을 지냈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공포되자 김하락(金河洛)․구연영(具然英)․조성학(趙性學)․신용희(申龍熙) 등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와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조직인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 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단발령이 공포되자, 이미 이천을 비롯한 경기도 지역에 의병봉기 기운이 조성되어 있었으므로 광주․시흥․안산․죽산․음죽․지평․포천 등 여러 고을에서 의병이 모여들어 ‘이천수창의소’가 성립되었다. 1896년 1월 이천수창의소 선봉장으로 안성 일대의 의병을 모아 항일무장투쟁에 나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인 이천의 백현(魄峴)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백현 전투’란 1896년 1월 경기도 이천의 백현에서 의병과 일본 수비대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백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천의 의병은 1896년 2월 13일 이천 서쪽의 이현(梨峴) 전투에서도 일본군과 돌격전을 벌였으나 패배로 많은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에 흩어진 군사들이 2월 25일부터 다시 이현에 집결하여 부대를 수습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광주 의병과 여주 의병이 이천 의병에 합세하였는데, 각 지역의 의병이 통합되어 병력이 2,000여명에 달하게 되자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이에 남한선성으로 본진이 옮긴 뒤에는 서울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의병 진영의 내분으로 서울 진공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으나, 당시 의병 진영의 활동이 대부분 각 지역에서 친일 개화파를 응징하여 일제 침략 세력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 것임에 비해, 이들은 서울로 직접 진공함으로써 국왕을 보호하려 했다는 점에서 근왕정신을 보다 구체적으로 행동화했다고 하겠다.

남한산성 전투에서 패한 뒤에는 제천의 유인석(柳麟錫) 의진을 거쳐 예천의 서상렬(徐相烈) 부대에 합세하여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관군의 토벌작전에 밀리게 되어 낭천(狼川: 현재의 화천) 전투에서 서상렬을 잃고, 유인석을 따라 만주의 회인현(懷仁縣)까지 이동하였다.

1905년에는 원용팔(元容八) 의진에 가담하였으며, 1906년에는 최익현(崔益鉉) 의진의 소토장(召討將)으로 참여하였다. 1907년에는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이강년이 체포된 뒤 원주로 낙향하여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을 후학에게 펼치다가 생애를 마쳤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는 ⌈집의당유고(集義堂遺稿)⌋가 있다.

⌈집의당유고⌋ 행장의 내용에 따르면, 타고난 자질이 뜻과 기개가 크게 뛰어났고 위풍이 당당했으며, 목소리는 크고 맑았다. 관례를 올리고 나서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별군직(別軍職)으로 첫 벼슬에 올랐으며 또한 승급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는데, 동료들이 기개와 절조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1898년 1월 요동(遼東)으로 들어가 유인석에게 대학(大學)과 맹자(孟子)를 배웠으며, 가을에 돌아와 지평(砥平) 금리(錦里)에서 이근원(李根元)을 스승으로 섬겼다. 이에 스승은 일찍이 김태원이 의지가 굳세고 강직하여 굽히지 않으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한다고 칭찬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비록 쌀이 떨어진 때라 할지라도 편히 처하였으며, 선대의 묘소가 4백, 5백 리나 떨어져 있었으나 한 평생 봄가을로 빠지지 않고 반드시 가서 성묘하였다. 더러 여관에서 선대의 기일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옷과 갓을 차려입고 앉아 밤을 새웠다. 사문(師門)의 일로 군현(郡縣)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조금도 괴로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나라 안에 덕망과 학문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원근을 따지지 않고 반드시 찾아가서 만났다. 젊어서는 일찍이 술을 좋아하여 몇 말의 술을 사양하지 않았으나 유인석에게 경계의 말씀을 듣고부터는 곧바로 술을 끊고 늙기까지 조금도 입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의관을 매우 거룩하게 하여 아무리 심하게 병이 들어도 일찍이 두건과 버선, 행전을 벗은 적이 없었다.

서사(書社)에 유인석, 이근원 두 선생의 화상을 봉안하고 매달 초하루에 심의(深衣)와 대대(大帶) 차림으로 봉심(奉審)하고 참배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학문에 종사하지 않아 도리를 모른다면 곧 사람의 자식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덕을 좋아하고 선비에게 몸을 낮추는 도량이 천성에서 나왔으므로,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 하더라도 높일만한 학업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무릎을 꿇었다. 겉을 꾸미는 일이 없었고 좋지 못한 풍속을 바로잡는 기풍은 있었는데, 고금에서 찾아봐도 그와 짝할만한 자가 아마 드물 것이다.”

⌈집의당유고(集義堂遺稿)⌋는 충청북도 제천에서 활동한 문인이자 의병장 김태원의 문집이다. 1책의 필사본이다. 남아 있던 유문을 아들인 김성모(金性模)가 중심이 되어 편집하였으며, 성책된 문집은 한말의병자료집(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에 영인되었다. 내용은 서문, 시(詩), 서(書), 잡저(雜著), 제문(祭文), 통문(通文), 부록(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아들인 김성모의 청으로 1951년 유지혁(柳芝赫)이 썼다. 서문에는

“스승인 유인석의 문하에 의로운 선비가 많이 있었는데, 집의당(集義堂) 김태원(金泰元)은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을미년에 국변(國變)을 당하게 되자 앞장서서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유인석을 따랐다. 대운(大運)이 전도(顚倒)되는 바람에 패하긴 하였으나, 의로운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어 전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삭발(削髮)의 화를 면하게 한 그 공을 어찌 작다고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잡저에 수록된 「을병사략(乙丙事略)」에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이천에서 창의하게 된 경위부터 제천 의병과의 결합과 패퇴, 1896년 강원도 낭천(狼川)에서 함께한 서상열의 전사와 낙오, 요동에 스승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갔다가 돌아오기까지의 과정 등을 기록하였다. 유인석․이강년(李康秊)․이근원에 대한 제문(祭文)과 유중교(柳重敎), 이근원의 묘의(墓儀)에 대한 통문(通文)이 있다. 부록에는 유사(遺事), 이규현(李奎顯)이 쓴 행장, 유제함(柳濟咸)이 쓴 묘표가 수록되어 있다. 한말 의병장 김태원의 학문과 사상 및 이천․여주․제천 의병의 활동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김태원이 경기와 충청 의병에 모두 참가하였으므로 문집에 수록된 서간문과 비지문을 통해 경기 의병과 제천 의병과의 상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