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조(李賀朝:1664~1700)


이하조(李賀朝:1664~1700)                                 PDF Download

 

의 자는 낙보(樂甫), 호는 삼수헌(三秀軒)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증조는 이정귀(李廷龜)이며 조부는 이명한(李明漢)이고 아버지는 이단상(李端相)이다.  이단상은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과 깊은 학문적 교류를 가진 인물로 율곡의 계열로 분류된다.  이단상의 문하에 임영(林泳),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등이있다. 이가운데김창협은 그의 사위였으니 이하조에게는 자형(姊兄)이 된다. 이하조 의 형 이희조(李喜朝) 역시 송시열의 문하생이다.

이하조는 6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 희조를 따라 공부 하였으므로 아버지의가 르침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19세 되던1 682년에 사마증광시(司馬增廣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그 뒤 대과(大科)는 단념한 채 학문에만 매진하였으며, 영지동(靈芝洞)에 집을짓고 삼수헌(三秀軒)이라 이름지었다.  이해에 형  희조와 함께 여강(驪江)으로 송시열을 찾아가 출처(出處)의 의리에 대하여 자세히 들었다.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 성리학(性理學)과 경서(經書)를 주로 공부하였지만 시인(詩人)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때로 친구들과 산림을 유람하며 한아(閑雅)한 취미를 길러 시(詩)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1686년 (숙종12) 3월에 형 희조와 우거하 고있던 민태중(閔泰重)과 학궁(學宮)의 제생 10여명이 파계(巴溪)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주자대전(朱子大全)》 의교정(校訂)하는 일을 도왔다.  이 시기에 간간히 시간을 내어 강산을 유람하며 시회(詩會)를 갖곤 하였는데 헤어질 때에 돌아오는 여름에 상당(上黨: 지금의 청주(淸州))과상산(常山)의 경계에서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기일(期日)이되어 우암은 손자 인주석(疇錫)을 대동하고 상당 남쪽경계에 성묘를 하였다.  이때 이희조가 기년상(朞年喪)을 당하여 서울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암이 그와 만나지 못하는 섭섭한 마음을 안고 파계로 돌아왔는데 이하조가 상산에서 뒤 따라와 서형이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라고 전하자,  산중에 오래 머물면서 그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조정에서 들려오는 여론이《주자대전(朱子大全)》에 차의(箚疑)하는 것은 망녕되게 국법에 저촉된다 하여조정의 논의가 매우 부정적이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우암은 탄식하며 산을 내려와  소장(疏章)을 올려 죄를 청하였다.  이 때문에 산속에서 이희조를 기다리고자 했던 계획이 어긋나게 되었음을 토로한 적이 있다.
우암이 82세의 나이로 이해 7월에 쓴 편지에 그 내용이 보인다.  이후로도 우암과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1688년(숙종14년) 이하조는 파계에서 모였던 일을 추억하였으며, 우암은 제자에게 답한 편지 글에서 그날의 모임에 대한 의미를 찾으며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1694년(숙종20)에 시국이 안정되는 모습을 보이자, 친구들이 과거에 응시할 것을 권하였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 뒤에 세자 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의 제명(除命)에 응하였던 것은, 선대(先代)의 공음(功蔭)을 이어받아 벼슬하는 것이 세신(世臣)의 본분이며, 고을을 얻어 봉양하기에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었다. 시직(侍直)과 부솔(副率)주부(司僕寺主簿)가 되고 공조좌랑(工曹佐郎)이 되었다. 1698년(숙종24)에는 부평현감(富平縣監)이 되어 어진정사를 폈다. 이때에 정사를 보던 곳의 이름을《대학(大學)》의<청송장(聽訟章)>을취하여 ‘사무헌(使無軒)’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공자(孔子)가 말한

“송사를 처결하는 것을 내가 남들처럼 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처결해야 할 송사 마저도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라고 한데서 인용한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자형인 김창협(金昌協)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르침을 구하였다.  김창협은 이에 대하여 처음에는 “송사를 없게한다.”는 말은 성인(聖人)의 일로서,  명덕(明德)을 밝히고 백성 을새롭게 한 뒤의 최고의 보람인 것인데,  어찌 그가 미칠 수 있는 경지 이겠느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 뒤에 생각해보니 처남인 이하조가 어진 마음에서 출발하여 송사를 판결하지 않은 것이지,  단순히 편리를 추구하여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처남이 어찌 송사가 없는 것이 오늘날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성인의 일인 줄 몰라서 그렇게 하였겠는가 하며 반문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말로 헌(軒)의 이름을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으니 훌륭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700년(숙종26년) 병으로 경사(京師)에 돌아가 강도유수(江都留守)가 되었으나, 친분으로 인해 공정하지 못하다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 는의혹으로 벼슬이 갈렸고,  병이 위독해져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7월 10일37세의 나이로 운명하였으며 처음에 영지(靈芝)와 7리 떨어진 비교적 가까운  독정리(獨井里)에 장사 지냈다가 1710년(숙종36년) 3월에 용인 문수산(文秀山) 선영(先塋)으로 옮겼다.

그는 안동(安東) 김창국(金昌國)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두었으나 일찍 죽었다.  그리하여당 형(堂兄)인 감사(監司) 이해조(李海朝)의 아들 숭신(崇臣)을 후사로 삼도록 하였으며,  네 명의 딸을 두었다.  숭신은 부사(府使)심징(沈徵)의사 위가되었다.

그의 자형인 김창협이 지은 뇌문(誄文)을 보면

“언의(言議)가 구차하지 않고 식견이 분명하고 발랐으며,  문사가 통창(通暢)하고 풍조(風調)가 울연(蔚然)하였다.”

라는 글이 보인다.  또 외사촌형인 서종태(徐宗泰)가 쓴 묘지명에 는

“세덕(世德)을 계승하여 집안에서 닦고 성대한 재능을 온축하였으니,  나와서 명예를 구하였으면 세상에 그 보다 앞설자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취를 거두어 스스로 진취(進取)하여 달려 나아가는 길에서 멀어진 것이 이미 고상하다.”

고하였다.

당시에 그가 지은 시문(詩文)이 1천여 편이 있다고 하며,  권상하(權尙夏)의 묘표에는 그의 유고 4책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 전해 오는 저서는《삼수헌고(三秀軒稿)》이다.  이유고는 자형인 김창협과 동생 김창흡이 산정한 고본(稿本)으로 이하조의 형 희조가 부록 등을 증보한 것인데,  친구인 나주목사(羅州牧使) 조정만(趙正萬)의 협조를 받아 그의 사후 13년이 지난 뒤에 발행한 5권 1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