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조(李喜朝, 1655∼1724)


이희조(李喜朝, 1655∼1724)                                PDF Download

 

희조(李喜朝, 1655∼1724)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며 유학자로,  대사헌,  이조참판, 인천부사, 천안군수 등을 역임했다.  인천 부사 재직 때에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송시열의 문인이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기 전에는 박세채(朴世采)를 따랐으나 나중에는 송시열의 노론을 지지했다.  경종이 즉위하던 해 노론파가 실권하면서 영암(靈巖)으로 유배되었다가 다른 곳으로 이송하는과정에서 사망하였다.

1655년(1세,효종6년)에부제학(副提學) 이단상(李端相)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이며,  자는 동보(同甫),호는 지촌(芝村)·간암(艮菴),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0년(26세,숙종6년) 경신환국이 일어난 뒤 유일(遺逸)로 천거되었다.  이때는 남인들이 실각하고 다시 서인들이 복권한 때였다.  이후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가, 다시 전설별검(典設別檢), 의금부도사, 공조화랑, 진천현감(鎭川縣監) 등에 임명되었다.

1694년(40세,숙종20년) 갑술옥사로 다시 기용되었다.  인천현감(仁川縣監), 동궁서 연관(東宮書筵官), 지평(持平), 천안군수, 장악원정(掌樂院正) 등을지냈다.

1697년(43세,숙종23년) 인천 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인천에 부임했다.  그는 ‘이곳은 나의 아버지(이단상)가 부사(府使)를 역임한 고장으로, 부친의 치적이 아직 남아있는 이곳에서 정치를 잘 하지 못해 죄를 짓게 된다면 무슨 있겠는가?’ 라고 하며 선정을 베푸는데 힘썼다. 그곳에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이 많
았는데,  그들을 구제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곳을‘ 인민당(人民堂)’이라하였다.  있다. 이단상과 이희조 두 부자(父子)의 선정은 오랫동안 인 천사람들에게 기억되었다.

1702년(48세,숙종28년) 인천 문학산(文鶴山) 기슭에 학산서원(鶴山書院)이 세워졌다. 이곳에 부친 이단상(李端相)이 배향되었다가 나중에 이희조도 함께 배향되었다.

1707년(53세,숙종33년) 장령(掌令), 해주목사(海州牧使)에 임명되었다.  해주목사 재직 시에는 석담(石潭)에 있는 율곡 이이(李珥)의 유적에 요금정(瑤琴亭)을 세  . 또 이제묘(夷齊廟)에 송시열의 글씨로 편액을 달고 기(記)를 지어 걸었으며,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들을 위해 사당을 세웠다.
이희조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율곡이 정한 고산구곡(高山九曲)  중여덟 번째 절경인 금탄(琴灘, 거문고 소리를 내는 여울)을 노래했다.

八曲溪山何處開
여덟번째골짜기는어디로열렸을까?
琴灘終日好沿洄
금탄의골짜기는종일토록오르내리기좋구나.
牙絃欲奏無人和
거문고를타고싶으나화답해줄사람없네.
獨待靑天霽月來
홀로기다리네, 푸른하늘에밝은달떠오르길.

1578년 율곡은 고향으로 내려가 해주 석담에 은거하면서,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본격적으로 후학 양성을 추진하였다.  그때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본따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를 지었는데,  총 10수로 구성된 시조 형식의 시가였다.  그 중 여덟 번째 ‘팔곡(八曲)’의 시는 다음과 같다. (요즘 문장으로 일부 수정함)
한문 은송시열이 번역한것이다.

八曲何處是  여덟째 골짜기는 어디일까?
琴灘月正明  금탄에 달이 참 밝구나.
玉軫與金徽  옥 거문고 금 거문고,
聊奏數三曲  두서너 곡 무심히 타보는데,
古調無知者  옛 가락 아는 이 없구나.
何妨獨自樂  누가 막으리, 혼자서 즐기는데.

이희조의 시는 밝은 달이 떠오르길 기다리는데 그것은 아마 도율곡 이이가 팔곡의 금탄을 노래한 시에서 달이 밝은 때 혼자서 거문고를 타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 같다.  때까지 기다리면 율곡이 그곳에서 거문고를 탄 것처럼 자신도 그때의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달 밝은 밤 거문고를 타면서 율곡과 한 마음이 되어보고 싶은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1717년(63세,숙종43년)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 이조참판·찬선·좨주 등을 역임했다.  다음해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또 그 다음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721년(67세, 경종1년)신임사화(辛壬士禍)가 발생하였다.  연잉군(후일의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였는데,  결국 소론파가, 경종에 대한 불충을 빌미로 노론파를 탄핵했다.  이에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4대신이 유배당하고, 이희조도영암(靈巖)으로 유배되었다.
이희조의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있을 것같다.( ⌈지촌집 ⌋권1)

纖雲不起玉輪盈
고운 구름 일지 않아, 밝은 달 가득차고,
影入淸溪溪更淸
맑은 시냇물에 달그림자 비치니 더욱 맑구나.
安得此心同此月
어찌하면 이 마음 저 달처럼 될까?
普天幽谷一般明
온 하늘 깊은 계곡까지 모두 밝게 하네.

1724년(70세, 경종4년)에 유배지가 변경되어 철산(鐵山)으로 이동하는 중에 정주(定州)에서 사망했다.  그는 후진양성에 힘쓰면서 많은저서를 남겼는데,  대표적 저서로 ⌈대귀설(大歸說) ⌋,  ⌈지촌집(芝村集) ⌋ 32권 등이 있다. ⌈대귀설 ⌋은 송시열이 귀양간 뒤에 양주의 지동(芝洞)으로 내려가 지은 것이다. ⌈지촌집 ⌋은 32권 15책으로 1754년(영조30년)에 이희조의 아들 이양신(李亮臣)이 간행하였는데,  이 가운데
에는 송시열(宋時烈)이 남인에게 몰렸을 때 그를 변호하는 문장, 억울하게 죽은 송시열에 대해 논죄 사실을 비판한 문장,  그리고 윤휴(尹鑴)나 윤선거(尹宣擧)에 대해서 비판한 문장 등이 실려 있다.  또 이문집에는 ⌈대학⌋,  ⌈중용⌋ ,  ⌈심경⌋,  ⌈태극도설(太極圖說)⌋,  ⌈맹자⌋등에 대해서 묻고 답한 문장,  상제례(喪祭禮)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한 문장,  율곡의 행적에 관한 문장 등도 함께 실려 있어 후대 학자들이 중요시하였다.
이 외에도 그가 편찬한 서적으로 ⌈우서절요(尤書節要)⌋,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륙동이집람(朱陸同異輯覽)⌋, ⌈송원명서절요(宋元明書節要)⌋,  ⌈오선생서절요(五先生書節要)⌋,  ⌈해동유선록(海東儒先錄)⌋,  ⌈속경연고사(續經筵故事)⌋ 등 다수가 있다.

다음해 1725년 영조가 즉위하자,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복권되어, 좌찬성에 추증 되었다. 인천(仁川) 학산서원(鶴山書院),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 평안북도 정주군의 간암서원(艮菴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이중 간암서원은 1731년(영조7년)에 정주 유림들이 뜻을 모아 이희조(李喜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그곳에 위패를 모신 것이다.

<참고자료>
『지촌집(芝村集)』
조준하, ⌈이희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연두, ⌈간암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희조⌋, 『인천광역시사- 인천의인물』,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