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순(宋秉珣, 1839-1912)


송병순(宋秉珣, 1839-1912)                                 PDF Download

 

병순은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으로, 형 송병선은 1905년 을사늑약에 비분강개하며 스스로 자결한 순국지사이다. 9세조인 우암 송시열은 효종과 동심동력하여 설욕을 갚고자 북벌을 준비한 당대의 거유로 소중화(小中華), 존화양이(存華攘夷) 등 춘추의리(春秋義理)의 화신이었다. 조선유학사에서 도학에는 정암 조광조요, 학문에는 퇴계 이황이요, 성리에 율곡 이이라고 하는데 조선 역사를 통틀어 의리에 관해서는 우암 송시열을 으뜸으로 삼는다.

형 송병선은 1905년 을사늑약을 반대하며 자결하였고 동생 송병순은 1910년 경술국치 후에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억누르다가 마침내 1912년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두 형제가 유학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국권을 빼앗김에 분연히 일어나 순국하였으니 가학이요 학통을 계승한 것이 이와 같았다.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자는 동옥(東玉)이며 호는 심석재(心石齋)이다. 형 송병선과 함께 큰아버지 송달수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했으며, 송달수의 사후에는 작은아버지 송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이는 송시열 – 권상하 – 한원진 – 송능상 – 송환기, 김정묵 – 송치규 – 송달수, 송근수 – 송병선, 송병순으로 이어지는 학맥이다.

1865년(고종 2)에 서원 철훼령이 내려 만동묘가 헐리게 되자 춘추대의 정신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훼손하지 말 것을 상소하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는 만동묘는 송시열이 유명으로 수제자 권상하에게 신종과 의종을 제사 지낼 사당을 건립하라고 하여서 세워졌다. 1865년(고종 2년) 조정에서는 대보단에서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만동묘를 철폐했다가 1873년(고종 10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자 이듬해 왕명으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

그러다 1907년에는 우리 의병을 토벌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환장암과 운한각을 불태우고 이듬해에는 만동묘를 폐철하는 동시에 만동묘에 소속된 재산을 국가와 지방 관청에 귀속시킨다. 이런 상황에서도 1910년 송병순(1839∼1912) 등이 존화계를 조직하여 제사를 이어가는 등 유림들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제향이 이어졌으나, 1940년부터는 일제의 강압으로 영영 끊기게 되었다. 여기서도 송병순의 존화양이의 춘추의리 정신을 잘 알 수 있다.

1888년(고종 25)에는 의정부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894년(고종 31)에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찾아오는 손님도 만나지 않는 등 칩거하였다. 동학군이 봉기하자 향약을 보급하여 향인을 교화했으며,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자정(自靖)의 생활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데만 전념하였다.

1903년 학행이 뛰어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아 고종이 홍문관서연관(弘文館書筵官)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영동군 학산면 활산에 강당을 세우고 많은 문인들을 지도·계발하여 천리를 밝히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정력을 기울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나라를 위하는 충성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순국하는 길밖에 없다.” 하고 그 해 9월 5일 강당 위 서산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투신자살하려고 하였다. 그 때 마침 문인 김용호(金龍浩)가 뒤에서 껴안아 실패하자, 그 뒤 두문불출하고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이 때 영동군 양산의 일본 헌병대가 은사금을 가져오자 이를 질책하여 거절하였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15권의 문집과 『독서만집(讀書漫錄)』, 『학문삼요(學問三要)』, 『사례축식(四禮祝式)』, 『용학보의(庸學補疑)』, 『주서선류(朱書選類)』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