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곤(曺毅坤, 1832-1893)


 

조의곤(曺毅坤, 1832-1893)                                  PDF Download

 

의곤(曺毅坤, 1832-1893)은 본관이 창녕, 호가 동오(東塢)로 조현위(曺玹瑋)의 아들이다. 기정진(奇正鎭)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거주지 근처 언덕에 조그마한 정자 동오정(東塢亭)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짓고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1832(1세, 순조 32년)에 검암리(지금의 고창읍 월암리)에서 태어났다. 본(本)은 창녕(昌寧), 자(字)는 사홍(士弘), 호(號)는 동오(東塢)이다. 아버지는 조현위(曺炫瑋), 어머니는 죽산 안씨 안광영(安光暎)의 딸이다. 그는 효자로 널리 알려졌는데, 나중에 노사 기정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여 특히 경학에 조예가 깊었다.

1860(29세, 철종 11년), 사찰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스승 기정진으로부터 격려의 서찰을 받았다. 서신에는 전염병이 나돌고 있어서 걱정이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1871(40세, 고종 8년), 스승 기정진으로부터 서신을 받았다. 스승은 뒤늦은 나이에 학문의 기반을 닦은 자신을 거울삼으라고 조언하였다. 아울러 낙담하지 말고 학문에 정진하라는 격려의 말도 담겨 있었다. 이후로도 기정진은 조의곤에게 여러 통의 서신을 보냈다. 그 중에는 동강(東岡, 동쪽 언덕)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것을 축하하는 서신, 위통과 설사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자신의 근황을 적은 서신, 어려운 살림살이를 걱정하며 격려하는 내용의 서신 등이 있다. 모두 기정진의 문집에 실려 있다.

1873(42세, 고종 10년), 손자 조덕승(曺悳承)이 태어났다. 덕승이 4살 때부터 글을 가르쳤다. 나중에 그는 할아버지가 사망한 뒤 23세 때(1895년)부터 기우만(奇宇萬)과 최익현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할아버지 조의곤의 묘갈명은 그가 25세 때 충북 청양에 살던 최익현(崔益鉉)을 찾아가 부탁하였고, 1899년 『노사집(蘆沙集)』 간행에도 힘썼다. 할아버지의 유집인 『동오유고(東塢遺稿)』를 간행한 것도 그였다.

1876(45세, 고종 13년), 2월 일본과 강화도 조약, 즉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가 체결되었다. 강압에 이루어진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이로써 조선은 개국을 하고 본격적인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다. 이해에 스승 기정진(1798-1876)이 사망하였다. 조의곤은 노사의 고제로 스승에게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스승의 초상을 치르고 귀향하여 마을의 동쪽 언덕 위에 동오정을 지었다. 당시 주변의 유림과 제자들뿐만 아니라, 타성의 문중에서도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거두어 정자를 짓는 경비로 충당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열의와 열망이 담긴 건물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학자들과 학문을 강론하고자 하였다. 동오정은 나중에 대원군이 현판을 써준 정자로도 유명하였다.

동오정이 지어진 곳은 물과 돌과 숲이 어우러지고, 오른쪽의 높은 바위에서 폭포가 흐르는 곳이었다. 앞에는 작은 연못도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정자의 모습은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앞이 4칸이고, 옆이 2칸이었다. 동오정은 ‘동오정사’라고도 불렸는데 원래는 고창군 고창읍 석정리에 세워졌다. 현재 위치(월산리)는 최근에 옮겨진 것이다.

그는 동오정을 지은 뒤 친구들에게 이렇게 알렸다.

水石東岡正侈奢
수석으로 치장한 동쪽 언덕은 정말 멋지다네

如今最恨故人遐
하지만 지금은 옛 친구들과 멀어진 것이 제일 한스럽구나.

他日相尋方丈下
언젠가 이곳 방장산 아래를 찾아오거든

竹林缺處是吾家
대나무 숲속 비어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라네.

또 이런 시를 써서 자신의 생활 모습을 그렸다.

千古良朋時對籍
천고의 좋은 벗은 때때로 대하는 서적이로다.

十年活計晩栽桑
장차 10년의 생활 계획은 늦게 심은 뽕나무라네.

家人休說田無穫
집안사람들아 밭에서 얻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

秋熟園林果蓏香
가을 깊어가는 원림에는 과일 향기가 향기롭구나.

원림은 담을 둘러친 정원에 숲을 가꾸어 논 것을 뜻한다. 스승이 사망한 뒤 정자를 짓고 조용히 자연과 책을 벗 삼으며 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동오정은 나중에 그의 손자인 조덕승(曺悳承)이 후진 양성에 사용하였다.

1893(62세, 고종 30년)에 사망하였다. 나중에 기정진의 제자인 정재규(鄭載圭), 조성가(趙性家), 김녹휴(金祿休) 등과 함께 고산서원(高山書院,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 고산마을 소재)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시문집 「동오유고(東塢遺稿)「가 있다. 이 시문집은 목활자본으로 1899년에 제작되었는데 총 6권 2책으로 아들 조석휴(曺錫休)가 발간한 것이다. 서문은 기정진의 손자 기우만(奇宇萬)이 썼다. 발문은 조석일(曺錫一)이 쓴 것이다.

제1권에는 시 7수, 제2권에는 서(書) 39편, 제3권은 제문 5편, 축문 5편, 잠 1편, 잡저 5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4권은 「강산차록(江上箚錄)」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의 학문과 사상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자료로, 여기에는 스승 기정진과의 학술적인 문답이 정리되어 있다. 부록 2권에는 제문, 행장, 묘갈명 등이 포함되어 있다.

잡저에는 5편의 문장이 들어있는데, 「지도론(止盜論)」, 「송족제병삼서행설(送族弟昞三西行說)」, 「과눌설봉정기상사우만(寡訥說奉呈奇上舍宇萬)」, 「서증족질석일(書贈族姪錫一)」, 「기몽설(記夢說)」등이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자료>

「노사집」 ,「동오유고」권호기, 「동오유고(東塢遺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권수용, 「노사학파의 누정 건립운동 연구」, 「석당논총」 제49집, 2011.3오인교, 「南道 정자기행(2617)-고창 동오정(東塢亭)」, <한국매일>, 2015.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