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흠(宋明欽)


송명흠(宋明欽)                                                              PDF Download

1705(숙종 31)∼1768(영조 4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회가(晦可), 호는 역천(櫟泉). 1705년 10월 21일 한성 제생동(濟生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요좌(宋堯佐)이며, 도암(陶庵) 이재(李縡, 1680∼1746)의 문인이다. 송명흠 역시 23세 때 고양(高揚) 화전(花田)으로 이재를 찾아가 배웠다. 어릴 적에는 사화를 피하여 낙향하는 아버지를 따라 옥천․도곡(塗谷)․송촌(宋村) 등지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뒤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충청도도사․지평․장령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754년(영조 30)에 특별히 서연관(書筵官)에 제수하여 별유(別諭)를 내리기까지 하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1755년 옥과현감이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3년상을 마친 뒤, 집의․승지․참의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모두 글을 올려 거절하였다. 만년에 정국이 다소 안정되면서 1764년 부호군에 임명되고 찬선(贊善)으로 경연관이 되었으나, 정치문제를 논의하는 도중에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는 발언을 하여 파직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송명흠은 영조로부터 ‘산야(山野)의 당을 모으는 자’이며 ‘당론의 폐단’을 자행하는 인물로 지목되어 모진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44년 7월 13일에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자질이 아름답고 실천이 독실하여 젊어서는 높은 명망을 받았다. 중간에 임금의 부름에 따라 도성에 나아가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서 논의하는 자리에서 대답하고 상소한 것이 모두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

라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내용에서 볼 때, 그의 관료로서의 소신있는 행동을 엿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순조실록」, 순조 3년 9월 7일에는

“송명흠은 지조가 맑고 태도와 행실이 돈독하여 진실로 군자의 성대한 덕이 있어 우뚝하게 사림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한편 송명흠의 학문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에 뿌리를 둔 가학(家學)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그는 17세기 대표적인 예학자이며 사림세력을 주도해 간 학자였던 송준길의 4대손으로, 그의 학문적 기반은 선조 송준길의 학문을 계승․정리하고 집대성하는데 기반을 두었다. 이에 어려서부터 부친 묵옹(黙翁) 송요좌의 엄격한 지도하에 유가의 기본 경전과 역사서 및 성리서를 두루 배우고 익혔으며, 공자․맹자․주자 등을 배우고 성현의 뜻으로 나아가는 가르침을 받았다.

송명흠은 가학의 전통을 보존하고자 37세 때에 종숙부 권화혁(權火赫)에게 송준길 연보의 간행을 건의하기도 하였고, 임종 3개월 전에는 문경 병천에서 송준길의 문집을 교정하였으며, 같은 달 상주 흥암에서 송준길 문집의 간행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임성주(任聖周)가 그의 「묘지명」에서

“송명흠은 마음을 세우고 학문을 하는 것에서부터 집에 있거나 조정에 나아가서 논의를 펴고 일을 처리함에 이르기까지 거의 하나도 송준길이 남긴 법도에 부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라고 쓴 것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영조실록」, 영조 39년 3월 5일에서도

“송명흠은 문정공 송준길의 4대손으로서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글을 읽고 몸을 닦아 사림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송명흠은 자신의 학문적 기반을 송준길을 계승하는 가학의 전통 위에 두었으며, 이러한 가학적 전통 위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구축해나갔다.

또한 이재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김창협(金昌協)-이재(李縡)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낙론학통을 계승하였다. 송명흠이 활동한 18세기는 인물성동이론논쟁 또는 호락논쟁이 당대의 철학적 화두로 등장한 시대였다. 말 그대로, 사람의 본성과 사물(또는 동물)의 본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두고 벌었던 논쟁이었다. 사람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을 같다고 보는 쪽을 동론(同論)이라 하였고, 다르다고 보는 쪽을 이론(異論)이라 하였다.

동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간(李柬)이 있었고, 이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원진(韓元震)이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의 ‘인성과 물성이 같은지 다른지’에 대한 견해가 심화되면서 주위 학자들까지 동조하였고, 이로써 학파적 양상으로 그 논쟁이 전개되었다.

호서(湖西, 충청도) 지방의 학자들이 한원진의 ‘이론’에 동조하고, 낙하(洛下, 서울 부근)지방의 학자들이 이간의 ‘동론’에 동조함으로써 ‘인물성동이논쟁’이라는 명칭 외에 호서와 낙하의 첫 글자를 따서 ‘호락논쟁’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전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한원진 외에 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위백규(魏伯珪)․송능상(宋能相) 등이 있었고, 후자에 속한 대표적 학자들로는 이간 외에 김창협․이재․박필주(朴弼周)․어유봉(魚有鳳)․김원행(金元行) 등이 있었다. 이로써 조선유학사의 3대 논쟁 중의 하나인 인물성동이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송명흠은 당시 호락논쟁에서 낙론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이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니, 이재의 사상은 그대로 송명흠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때문에 이재와 마찬가지로 송명흠은 사람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물론 성에는 본래적 의미의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 속에 내재된 의미의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는 구분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본연지성이라 하여 본연지성의 관점에서 보면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인물성동이론은 이 세계를 설명하는 세계관에 대한 해석과 연결된다. 성리학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리와 기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리는 원리․질서․법칙․규범 등으로 설명하고, 기는 음양을 비롯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적인 모든 것을 가리킨다. 송명흠은 사람과 사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리와 기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리와 기가 함께 있어야 한다(不相離)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에 더 근원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은 또한 리와 기의 엄격한 구분을 강조하는 사고로 이어졌다(不相雜).

이러한 관점에서 천리와 인욕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인욕을 억제하고 천리가 발현되는 본연의 세계를 중요시하였고, 이를 통해 의(義)와 불의(不義), 정(正)과 사(邪), 군자와 소인, 중화와 이적, 왕도와 패도 등을 분명히 구분하고자 하였다. <채오봉유적(蔡五峯遺蹟)>의 서문에서

“군신과 부자의 윤리는 하늘과 땅의 불변하는 강령이며, 중화와 오랑캐, 정(正)과 사(邪)를 엄격하게 판별하는 일은 춘추대의(春秋大義)이니 혹시라도 이것을 잃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사욕을 극복하고 천리를 회복하거나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이 혼란한 시대에 대처하여 천리를 실현시키는 일이며, 또한 그것이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으로부터 상처받은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춘추대의를 확립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조에게

“천하만사의 근본은 군주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니, 마음이 진실로 바르지 못하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바르게 하는 도리를 한마디 말한다면, 사사로움을 제거하고 천리를 회복하는 것일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모든 정치의 근본 역시 군주의 한 마음에 있으니 군주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바로 정치하는 근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송명흠은 현상적 측면의 기보다 근원적 측면인 리를 더 강조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그가 영조에게 올린 상소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풍속을 변화시키는 데는 교화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고, 교화를 세우고 두터이 하는 데는 학교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으며,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는 데는 현명하고 덕이 있는 사람을 높이고 본받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삼대(三代)의 성대한 시대로부터 우리나라의 여러 성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도리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영조실록」, 영조 32년 4월 14일)

즉 하나라․은나라․주나라와 같은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현명하고 덕 있는 사람을 높이 받드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말이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저서로는 「역천집」이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순조실록」, 「역천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천 송명흠의 主敬사상과 현실대응」(송인창, 「한국사상사학」14, 한국사상사학회,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