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징(成晩徵, 1659-1711)2

성만징(成晩徵)-2                                                  PDF Download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달경(達卿)이고 호는 추담(秋潭), 환성당(喚醒堂)이다.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문경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성호영(成虎英)이며, 어머니는 덕수이씨(德水李氏)로 통덕랑(通德郎) 이동야(李東野)의 딸이다. 권상하의 문인이다. 한원진, 이간, 윤봉구, 채지홍, 이이근, 현상벽, 최징후 등과 함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로 불린다.

8세(1666)에 시재를 보였다. 계단에 백일화가 핀 것을 보고 “백일화라 백일 동안 붉나니, 십일 동안 붉은 꽃이 없다더니 여기 백일 동안 붉게 피었네. [百日花, 百日紅。花無十日紅, 今有百日紅。]

16세(1672) 큰형에게 <대학>을 배울 적에 거경공부를 배우고 몸소 실천하여 수개월 후에 깨달은 바가 있어 시로 지었다. “위도 없고 아래도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이것이 무엇인고 물으면 만 가지 달라도 이원으로 통한다네.[無上亦無下, 無始亦無終。若人問此物, 萬殊一源通。] 큰형이 체용일원의 묘리를 대체로 알았다고 칭찬했다.

24세(1680) 화양동의 송시열을 찾아뵙고 큰 감화를 받아 입문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했으나 병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35세(1691) 황강으로 권상하를 찾아뵙고 사제의 연을 맺다.

40세(1696) 송시열을 도봉서원에 합향하는 것으로 이제억(李濟億), 정시한(丁時翰) 등이 반대의 소를 올렸는데, 성만징이 주장하여 변무의 소를 올렸다. 그 안이 대체로 성만징의 손에서 나왔다.

45세(1703)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과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당시 숙종이 왕자(王子)가 스승에게 글을 배울 때가 되었다고 하여 사부(師傅)를 아주 잘 고르라고 명한 뒤 성만징(成晩徵)을 왕자 사부(王子師傅)로 삼았다. 사관이 성만징은 영남의 명망 있는 선비라고 기록했다.

1704년 만동묘(萬東廟)의 향사(享祀)를 둘러싼 논쟁 때 「만동사시비변(萬東祠是非辨)」을 지어 송시열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성만징은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친명배청사상(親明排淸思想)이 남달리 강하였다.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성은 곧 이이다(性卽理).”라는 설과 “이기가 혼융(混融)하다.”는 설을 지지하여, 낙론(洛論)에 접근한 경향을 보였다.

예설(禮說)에 밝아 권상하, 이세필(李世弼) 등과는 상당히 깊이 있는 이론적 문답을 주고받았다. 또한 <학성도(學聖圖)>를 만들어 후학들에게 학문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문경의 한천사(寒泉祠)에 봉향되었다. 시문집인 <추담문집>이 있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추담문집(秋潭文集)>